바닐라 클럽 8부
바닐라 클럽 8부
8장
조선 호텔 일식당에 예약을 해 두었지만 예약 시간이 지나 버려서 근처에 있는 롯데 호텔로 방향을 틀었
다. 나는 호텔 로비 프런트 앞 푹신한 대기용 의자에 기대어 유리로 된 호텔 정문에 시선을 던져 두고
있었다. 차를 가져 왔으니 술 도 마실 수 없고,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연방 회전문을 밀고 들락거리는
뻔지르르한 사람들을 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무전기를 들고 있는 호텔 경호원 하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할 일 없이 그렇게 앉아 있다가는 의심 받기 쉽지요.]
[네 눈에는 내가 그것밖에 안 되 보이냐?]
나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어 보이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프런트로 갔다. [며칠 묵어 갈
작정인데...]
거만한 얼굴로 반말처럼 말했습니다. 특급 호텔 프런트에서는 예약도 하지 않은 내국인에게, 특히 나처럼 별
거 아니게 보이는 사람 에게는 방을 잘 내 주지 않는 게 무슨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프런트 직원은 순
식간에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미안하다는 표 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방이 있긴 한데요, 지금은 최고급 특실밖에 없습니다.]
직원은 최고급이란 말에 힘을 주었지만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습니다.
[그것 괜찮군.]
[게다가 더블입니다.]
[좋아.]
나를 호텔에서 며칠 왕처럼 지내다가 어느날 훌쩍 도망가버릴 위인으로 봤는지 직원의 얼굴은 점점 엉망
이 되어갔다.
다음날 일찍 카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카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짜증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
다.
[아침부터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려고 전활 했습니까!]
그 소리에 놀란 건 카마만이 아니었다. 내 옆에서 자고 있던 여자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내가 어제 말했죠. 당장 집으로 들어가 테잎을 없애라구요. 왜 안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런 막 되먹은
여자들 만나지 말라고 했죠? 왜 내 말을 안 들어요. 네?]
내 눈치를 살피던 여자는 시트를 몸에 두르고 침대를 빠져 나갔다.
[도대체 대관절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한테 나는 뭡니까? 왜 나한테 이러는 겁니까? 어디 입이 있으면
말 좀 해 봐요!]
만약 내가 막 된 집안에서 자랐다면 벌써 욕지거리라도 퍼 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교양
있게 행동하도록 교육받 으며 자랐다. 욕은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 버렸다. 욕실에서 샤워하
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렸을 뿐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습니다. 나는 카마에게 들리도록 소리나게 콧방귀를 뀐
후 수화 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나는 얼른 침대 옆에 반듯이 개어져 있는 가운을 걸쳤다. 함께 잔 여자도, 지난 밤 일도 좀처럼 생각나
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놀랄 일도 아니었다. 술을 많이 마시면 필름이 끊어지는 버 릇이 있었다. 까치발
로 욕실에 다가간 나는 가운을 여미며 욕실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문은 힘없이 스르르 열렸다. 여자는
목욕 거품을 잔뜩 풀어 놓은 동그란 대리석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여자는 동그란 눈가에 웃음
을 그리며 말했습니다 .
[누구? 부인?]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카마와의 관계를 어떻게 얘기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그 여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혼자 조니워커 한 병을 다 마시고 호텔 지하 디스코텍에
갔던 건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여자가 어떻 게 만난 여자이고 어떤 여자인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
았다. 그 기억을 내게서 찾기 보다 그 여자에게서 찾는 편이 낫겠다 싶어 욕조에 걸터 앉으며 대충 둘러
댔다.
[아니야. 전화하는 걸 들었으면 알잖아.]
흰 타올로 머리를 감싼 여자는 나를 알듯 말듯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 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여자도 다정스럽게 말했습니다.
[어제하고 너무 틀려서 그래. 그치만 지금처럼 말하는 게 한결 나아.]
내게 반말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꽤 많은 얘기를 했거나 막 되먹은 여자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였다.
나이는 많아야 스물 다섯 , 여섯 정도. 화장을 지웠는데도 갸름한 얼굴과 동그란 이마, 짙은 눈썹 등 전
체적인 인상에서 우아함이 풍겼고 피부도 고와 보 였다. 길거리 여자는 아닌 듯 했습니다.
[어제 어땠어?]
나는 은근 슬쩍 지난 기억의 소재를 물어 보았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나부터 말하라면... 꼭 나쁘지는 않았어. 그쪽은?]
나는 대답이 궁해서 여자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내 이름도 몰라?]
[촌스럽게 또 왜 그래? 서로 잊기로 약속했잖아.]
[그랬지? 나도 나쁘진 않았어.]
내 말에 여자는 약간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여자는 거품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습니다.
[난 있지, 그쪽이 아주 좋았단 말을 해 주길 바랬거든. 어제처럼 거창한 말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잊
지 못할 거라는 말 정도 는 해 줄지 알았어. 내가 그쪽에게 해 준 모든 일이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니까
좀 그러네...]
말을 하는 동안 여자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도대체 그 여자가 내게 뭘 해 줬고, 내가 그 여자에게 뭘
했는지 알아야 무슨 말 이라도 할 게 아닌가. 나는 여자의 눈치를 슬슬 살피다가 욕실에서 나와 버렸다.
나는 방을 휘둘러 보았다.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연두색 투피스가 몸만 빠져나온 것처럼 바닥에 반듯하
게 놓여 있었다. 투피스 끝자락에서 종아리 길이만큼 간격을 두고 흰 구두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놓인
내 옷도 마찬가지였으며 바지 끝 부분에 랜드로 바가 있었다. 호텔에서 알몸으로 함께 일어난 젊은 남녀
가 옷을 전혀 헝클어뜨리지 않고 쇼윈도에 진열하듯 잘 정리를 해 놓았다면, 둘 다 의 식이 있어서 그렇
게 하기로 합의를 했거나 둘 중 하나가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고 고집을 부렸거나 해서 일 것이었다. 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런 요구를 한 건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 그랬을까? 왠지 모르게 섬짜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옷을 입으려고 침대 주위를 돌며 속옷을 찾기 시
작했습니다. 그런데 침대 주위, 위, 심지어 밑에도 속옷이 없었다. 여자 속옷 도 보이지 않았다. 방안을 이
리저리 헤매던 나는 창가 소파에서 폴라로이드 즉석 카메라를 발견했습니다. 그 아래 즉석 사진 여러 장 이
잘 포개진 채 놓여 있었다. 첫 번째 사진 속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을 살피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중에는 욕실에 있는 여자뿐만 아니라 언 젠가 내가 카피를 맡았던 의류회사 디자이너의 얼굴
이 끼어 있었다. 얼른 사진을 넘겼다. 다음 사진에는 그 디자이너와 욕실에 있는 여자 그리고 술에 취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내 얼굴이 있었다. 다음 사진에는 욕실에 있는 여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 다음 사진에는 내 런닝과 팬티가 마치 투명인간이 입은 것처럼 간격을 두고 바닥에 곱게 놓
여 있었다. 그 다음 사진에는 앞 사진과 마찬가지로 내 옷이 반듯하게 바닥에 놓여 있었다. 욕실에 있는
여자의 속옷과 원피스가 각각 다른 다음 두 장의 사진 속에 있었다. 나머지 사진 한 장에는 여자 속옷을
입은 채 히히덕거리는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는 속옷 찾을 생각은 포기하고 바닥에 있는 바지부터 집어 들었다. 발을 집어넣으려고 바지를 벌리다
그 속에서 팬티를 발견 했습니다. 팬티와 바지를 동시에 입고 웃옷을 집어올렸다. 가디건을 입고 있는 와이
셔츠 안에는 예상대로 런닝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입고는 랜드로바에서 양말을 꺼내 신었
다. 신발 끈을 묶지도 않은 채 주위를 둘러 보며 뒷주머니에 손을 댔다. 지갑은 그대로였다. 지갑 내용
물을 확인할 할 틈도 없이 사진을 낚아채듯 들고 허겁지겁 방을 나와 버렸다. 담배 연기가 눈을 찔러 눈
꼬리가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태도에요? 정중하게 사과를 해도 받아 들일까 말까하는데.]
카마가 전화한 타이밍이 아주 나빴다. 내가 편지를 쓰고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나는 왜 또 전화를
했냐는 식으로 퉁명하게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카마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 때문
에 나는 기분이 팍 상했습니다.
[우리 사이에 또 무슨 볼 일이 남아 있습니까? 사과고 뭐고 쓸데없는 소리말고 전화 끊읍시다.]
[점점... 왜 이래요? 자꾸 그렇게 삐뚤게 나올 거에요?]
[삐뚤고 자시고...]
[느긋하게 생각하세요. 그 사진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깨끗하게 처리했어요.]
나는 카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껌벅거렸다.
[아무튼 당신은 내게 큰 빚을 진 거에요.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왜 몰라주는지 모르
겠어요. 다시는 나한테 소리치지 말아요. 당신은 나한테 그럴 처지가 못 되요. 알겠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건 내가 술이 엄청나게...]
[됐어요. 남자들은 다 그렇게 말하죠.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당신을 바꿔 놓겠어요. 여섯 시에 그
사진 사본이 당신에게 배달될 거에요. 칼라 프린터로 프린터 했는데도 사진이 선명하더라구요. 이제 나
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신 이 결정해야 할 차 례가 된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