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인연의 도가니
엇갈린 인연의 도가니
"아가씨...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해요..."
깊은 밤, 차가운 도시의 침묵을 깨는 강 부장의 나즈막하고도 근심 어린 목소리가 골목길의 어둠 속으로 흩어집니다.
야근의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는 귀갓길, 그 길모퉁이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웅크리고 있던 한 여인의 가련한 실루엣은 강 부장의 가슴속 깊이 묻어둔 부성애를 건드렸습니다.
술기운에 젖어 횡설수설하며 세상을 향해 독설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얼마 전 시집보낸 딸아이의 잔상과 겹쳐 보였고 강 부장은 차마 그녀를 차가운 길바닥에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그녀를 부축해 네온사인 불빛이 명멸하는 모텔의 방 안으로 이끌었을 때까지만 해도 강 부장의 마음은 그저 순수한 연민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침대 위에 뉘여진 여인의 가느다란 코골이 소리가 정적을 채울 때 강 부장은 잃어버린 청춘의 조각들을 떠올리며 한참 동안이나 그녀의 잠든 얼굴을 응시했습니다.
하지만 잠에서 깬 여인의 도발적인 눈빛과 "한번만 안아달라"는 애처로운 요청은 강 부장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억눌려 있던 남성의 본능을 거칠게 깨워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얗게 빛나는 여인의 나신이 어둠 속에서 유혹의 손길을 뻗치자 강 부장은 오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와 사회적 시선을 모두 잊은 채 불꽃 같은 열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했던 그 밤의 정사(情事)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의식이자 억눌린 삶에 대한 처절한 보상이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탐닉하며 지독한 쾌락의 끝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붉은 립스틱으로 거울에 남겨진 'Thank you'라는 짧은 메시지만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진 그녀는 강 부장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았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운명의 수레바퀴는 강 부장을 가장 잔인하고도 당혹스러운 자리로 안내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결혼할 여자라며 소개한 자리에 나타난 여인, '이수영'이라는 이름으로 인사하는 그녀는 바로 일 년 전 그 뜨거웠던 밤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동 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강 부장의 눈동자는 경악과 혼란으로 심하게 흔들렸지만 수영은 아직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다소곳한 예비 며느리의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강 부장은 아들과의 서먹한 관계, 그리고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도 수영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복잡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꼈습니다.
결국 고심 끝에 수영을 따로 불러내어 그날 밤의 진실을 고백했을 때 수영의 얼굴은 핏기가 가신 채 하얗게 질려버렸고 두 사람 사이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아저씨가... 이렇게 생기셨었군요..."
자신을 떠난 연인에 대한 복수심과 상실감에 취해 몸을 던졌던 그 밤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수영은 운명의 가혹함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강 부장은 딸 같은 그녀에게 느꼈던 연정과 아들의 배필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도 그녀의 순수한 영혼을 지켜주고 싶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 경수랑 결혼해 줄래? 난 반대할 생각이 없다."
자신의 과오를 덮고 그녀의 미래를 응원하려는 강 부장의 파격적인 제안에 수영은 눈물을 흘리며 인간적인 고마움과 복잡한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습니다.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자 생애 첫 오르가즘을 안겨준 남자,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수영아'라고 불러주는 따스한 존재가 된 강 부장을 보며 그녀는 인생의 아이러니에 실소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