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17화
야화 17화
5월말.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격을 흥정할 겸 적금산의 사저를 방문하여,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적금산과 대좌를 하였다. 돈 많은 갑부들이 모두 그러하듯 기름기가 번드르르하고 조금은 뚱뚱한 사람이 왼쪽 네 손가락에 굵직한 금반지를 모두 끼고 있었다.
예기를 느끼기는 어려웠으나, 이런 부류의 인간이 제일 다루기 어려운 법이다...오소리 같은 부류다. 별로 빠르지도 않고 늑장을 부리는 미련한 놈처럼 보이지만 사납기로 들면 그만큼 사나운 짐승도 드물다. 밀림의 왕자라는 금전표(金錢豹)도, 오소리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마병기(魔兵器) 중 천하 제일이라는 은형철삭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언제 어느 방향에서 어떻게 쳐 내는 줄도 모르게 당하고 만다고 하였다. 그런 비밀을 알고 있는 나는 조심을 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런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할 적금산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가?"
"그게... 어르신 몸에서 풍겨 나오는 예기가 너무 날카로워서..."
"뭐야?... 내 몸에서 풍기는 예기가 너무 날카롭다고 했는가?"
"15년 동안, 인적미답(人跡未踏)의 심산 속에서 사부님과 단 둘이 살아온 놈이라, 짐승들만 상대를 하다 보니 자연히 상대방의 기를 감지하게 되는데, 어르신 같이 무서운 분을 처음 대하다 보니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그만..."
"허허 허허... 허허 허... 허허 허..."
칭찬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은 드물다. 은형철삭의 위력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적금산은, 자기를 알아 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은 서운하였는데, 젊은 환쟁이가 그것을 알아 봐 준 것이다.
"그래서...그 깊은 산 중에서, 그림은 누구에게 배웠는가?"
"사부님이 글씨를 쓰라고 붓자루를 손에 쥐어 줄 때마다, 쓰라는 붓글씨는 쓰지 않고 끼적끼적 짐승 그림만을 그리고 있었는데, 사부님이 제 재능을 알아 보시고 지도를 해 주신 것입니다"
"의술과 무공도 사부님에게 배웠겠구먼..."
"어르신 초상화는 좀 비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려 온 초상화는 그야말로 끼적끼적 심심풀이로 그린 것에 불과한데, 어르신의 그 예기를 보고 나니, 그림 속에 그 예기를 담아 보고 싶어졌습니다"
"뭬 야?...예기(銳氣)를 그림 속에 담아?..."
"긴 말씀을 들여도 이해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추잡한 그림이지만 내가 그린 이 춘화도를 한 번 보신다면 어느 정도 짐작은 가실 것입니다. 첫 한 장은 그냥 보여 드리겠습니다만, 다음 장부터는 은 열 냥을 내고 보셔야만 합니다"
품 안에서 그 동안 정성 드려 그렸던 12폭 춘화도를 꺼내서 적금산 앞에 밀어 놓았다. 반쯤 풀어 헤친 여인의 저고리에서 젖통이 쏟아져 나왔는데, 한 손으로는 우악스럽게 사나이가 젖통을 움켜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치마를 벗겨 낸 장면이었다. 여인의 음부가 적나라하게 들어났는데 음부에 난 털 한 오라기 한 오라기가 살아 있는 듯 하였고, 요기가 물씬물씬 피어 올랐다. 적금산의 아랫도리가 불끈 불끈 요동을 치기 시작 하였다.
"대단하군 대단해... 이 춘화도를 내게 팔지 않겠는가?"
"모두가 12장인데 한장 당 금 열 냥은 밭아야만 하겠습니다"
"후후 후후... 자네는 나를 지금 호구로 보고 있는 겐 가?..."
"어딜요... 그나마 그것도 싸게 부른 값입니다... 어르신의 금 열 냥과, 굶주리는 가난한 백성의 한 푼 중, 어느 쪽이 더 무겁다고 생각 하십니까?" "?...."
"어르신의 금 열 냥은, 어르신에게는 눈곱만도 못한 금액이지만, 굶주린 백성의 한 푼은 한끼거리란 말입니다... 그 한 푼에 목숨이 달린 것이지요"
"허허 허허... 그래서 지금 내게는 비싸게 판다는 말이 아닌가?"
"억지로 권하지 않습니다...비싸다고 생각 하신다면 사지 않으시면 될 것입니다"
"팔지 않으면...그럼 자네는 무엇을 먹고 살아 갈 생각인가?"
"별 걱정을 다 하하십니다...산에 가면 널려 있는 것이 약초고 버섯입니다. 하루 두 끼만 먹으면 그런 대로 배고프지 않고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인데 무슨 걱정입니까?... 뿐만 아니라 병자를 찾아가 침을 놯 주면 밥 한 끼야 주지 않겠습니까..."
"그럼 자네는 집도 절도 없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갈 작정인가?"
"어르신... 가진 사람은 더 가지려고 합니다...저처럼 산에서 짐승들 하고 딩굴다 보면, 그 날 그 날 배부르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배가 부르면 토끼가 코앞을 지나가도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를 생각해서 함부로 욕심을 더 내지 않는 것이지요...지킬 것이 없으니 지킬 필요도 없고, 아옹다옹 싸울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됐네 됐어... 그래 내 초상화는 얼마를 받고 그릴 생각인 가?"
"금 백 냥!" "?...."
"앉아 있는 그림을 그릴지, 서서 멀거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 그림을 그릴지...그 것도 아니라면 금 덩어리를 산처럼 쌓아 놓고, 그 위에 누워 계신 그림을 그릴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합니다... 한 달만에 그릴지 일 년이 걸릴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림이 완성되고 나면 금 백 냥이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의 적금산 어른이 아니고는 누가 금 백냥짜리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겠습니까"
"허허 허허 허... 어르고 달래고 이리 치고 저리 치는구먼... 마음에 들었네 다른 요구는 더 없는가?"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마당에,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려면 매일 어르신을 관찰 해야만 하니, 조용한 방 한 칸을 내 주셔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염치 없는 말입니다만 젊은 혈기에 그냥 밤을 보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더러 계집까지 대령하라는 말인가?"
"천만에 요, 천만에 요...짐승들이 돈을 주고 암컷을 사는 법은 없습니다... 짝이라는 것이 있습지요"
"그럼, 그 짝이라는 여인을 데려 오겠다는 말인가?..."
"낄 낄 낄... 그 암컷이 잠자리에서는 좀 요란하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요란하다는 말인가?..."
"낄 낄 낄... 밤새 낑낑거리며 나 죽네 나 죽어 하고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 대니, 뚝 떨어진 곳에 있는 조용한 방 한 칸을 비어 주십사 하는 것이지요"
"그 짝이라는 여자도 무림인 인가?"
"아직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그리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또 무슨 소린 가?"
"지금은 밤새껏 뻐꾹 뻐꾹 울어 대느라 무림에 발을 내 디딜 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나중에는 어찌 된다는 말인가?"
"산속이나 동굴 속에서 뻐꾸기가 울어 대겠지요"
"알았네... 당장 자네가 거처할 방을 마련 하도록 일러 두겠네"
"오늘 밤부터라도 당장 기거 할 수 있도록 말입니까?"
"걱정하지 말게...뻐꾸기 열 마리가 울어도 될 것이네"
"낄 낄 낄...뻐꾸기 울음소리가 조금은 들려야, 어르신 잠자리도 뻐꾸기가..."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준 춘화도가 있지 않은가"
"낄 낄... 드린 것이 아니고, 판 것입니다 요... 금 백 이십 냥은 지전(紙錢)으로 준비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