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18화
야화 18화
북경 연왕부에만 있던 함녕 공주를 남경에서 알아 볼 사람은 없었다. 보름 달처럼 둥글고 허연 공주가 그나마 찰거머리 눈에 띨까 봐 살짝 얼굴을 바꾸고 적금산이 살고 있는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
별처럼 반짝 반짝 빛나는 미인은 아니지만, 아무리 반짝거리는 밤하늘의 별들도 보름달이 뜨면 그 빛을 잃는다. 한눈에 봐서는 모르지만 볼수록 기품이 있고, 모란처럼 대범한 아름다움이 깃든 공주였다. 적금산이 한눈에 공주의 기품을 알아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
자라 온 환경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공주로 자라온 위엄과 기품에다가, 일 년 가까이 천 풍림 소년과 같이 어울리면서 몸에 벤 야성미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야성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소녀인 것 같으면서도 원숙한 여인이 갖는 너그럽고도 요부 같은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운래객잔을 나오면서도 점소이들 손에 잔돈푼을 쥐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 오는 사람이 있거든 황금전장 곁에 붙어 있는 적금산의 사저로 찾아 오도록 부탁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은 10냥씩을 내고, 점혈을 풀어 달라는 불량배가 찾아 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불량배들이 은 10냥을 마련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을 것이었다. 와도 그만 오지 않아도 그만이었지만 내가 할 도리는 다 하고 싶었던 것이다...그 뿐만이 아니라 중간 중간에 초상화도 그리고 병자도 돌 보면서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황금전장에서의 첫날 밤은 더더욱 요란했다. 나 죽네 나 죽어 하고 뻐꾸기가 더 요란하게 설쳐 댄 것이다.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데 더 이상 이런 약은 없었다... 철없는 어린 남녀쯤으로 치부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적금산을 만나자 빙그레 웃는 꼴이, 뻐꾸기 울음 소리를 잘 들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러나 내 그림자는 적금산의 그림자 속으로 파고 들어 갔고, 공주의 그림자는 총관이라는 귀산신묘(鬼算神妙) 엽준(葉俊)의 그림자 속으로 파고 들어 간 후였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림자가 붙어 다니면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지켜 볼 것이며, 무슨 말을 나누는지도 알 수가 있을 것이었다. 느긋하게 세월이 흐르기만 기다리면 되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총관 귀산신묘 엽준이, 적금산의 마누라 방으로 기어들어 간 것이다.
"어머머 어머머... 황! 적금산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요?"
"첩하고 나란히 누워 내가 그린 춘화도를 들여다 보며 헐떡거리고 있소. 그런데 왜 그리 놀라시오?"
"그것 봐요...다른 것을 탐내면 내 것을 도둑 맞는단 말이에요..."
"무슨 소리요?"
"첩을 껴안고 헐떡거리고 있으니, 총관 엽준이란 놈이 적금산의 본마누라 껍질을 벗기고 있잖아요"
"저런...그렇게 안 봤는데 엽준이란 총관, 간덩이가 부었구려..."
"가만 가만이 좀 있어 봐요... 더듬지 말란 말이에요"
"적금산과 첩이 들어 붙었는데,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쯧 그럴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적금산을 모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단 말이에요" "뭐 요?..."
"본 마누라가 총관에게 언제 해 치울 것이냐고 채근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손 빼요..."
"아니 그것도 해치우지 못하고 질질 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들통이 나서 우리 두 사람이 죽는 꼴을 볼 작정이에요?"
"마님!... 마님도 알다시피, 장주가 가진 은형철삭은..."
"은형철삭에 대해서 총관이 나 보다도 더 잘 안단 말이에요?...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그 놈에게 주었더니, 이제는 기고만장해서 나 몰라라 하고 첩 년을 끼고 딩굴고 있으니, 더 이상은 두 눈을 뜨고 보고 있을 수 만은 없다는 말이에요..."
"본래 마님이 가지고 계셨다고요?..."
"마병기 중 천하 제일이라는 은형철삭을 아버님이 마교에서 훔쳐 가지고 나오시다가, 우호법인 소안독심에게 걸려 쫓기다가 소안독심의 손아귀는 벗어 났지만, 결국은 심독공(心毒功)인지 뭔지하는 독에 걸려 들어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지요"
"그 그럼 마님의 아버님이 천 천 천면..."
"그래요! 천면신마가 내 아버님이에요...아버님이 긁어 모은 재화로 황금전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적금산이 그 때는 당신처럼 20세가 조금 넘은 젊은 나이로 총관 일을 맡아 보고 있었지요... 아버님은 은형철삭과 비급을 나에게 남겨 주시고 독을 치료 하겠다고 태산 산속으로 들어 가셨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요"
"오오...그래서 장주가 마님에게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이로구려"
"그래요... 소식이 끊어진지 20년이 넘었지만, 언제 어떤 얼굴을 하고 나타날지 모르니까 나를 내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구요... 허지만 총관과 내가 들어 붙은 줄 알기만 한다면, 우리 두 사람은 요절이 날 것이에요"
"그런데 왜 은형철삭을 장주에게 내 주신 것입니까?"
"그 때는 내가 장주에게 홀딱 빠져 있기도 하였지만, 은형철삭은 아녀자가 익히기에는 벅찬 절기였지요...한동안 내가 익혀 보려고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그 놈에게 넘겨 준지는 10년이 채 못 되었는데, 그 놈도 아직 6성 정도 밖에는 익히지 못했을 것이에요"
"마님!...그럼 일을 끝내고 나면, 은형철삭의 구결을 소인에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총관 아니면 누구에게 내 주겠어요..."
"마님 아버님이 천면신마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 오실 것 같은데 그 때 가서..."
"염려하지 말아요...나를 뒷전으로 돌려 놓고 첩 질을 한 놈인데, 아버님이 아셔도 가만 두지 않으셨을 것이에요...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빨리 일이나 끝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환쟁이가 그린 춘화도에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 느긋하게 해도 염려 없습니다...요즘 젊은 환쟁이들이 '나 죽네' 하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자고 미칠 지경이었는데, 오늘 밤은 우리도 천천히 즐겨 봅시다"
"총관 죽고 싶어서 그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시병을 붙여 놓았답니다...장주가 일어나는 기척이 있으면 번개같이 알려 올 것입니다"
"그런 좋은 머리를 가지고 왜 그 놈 하나를 똑바로 처리 못하고 미적거려요?"
"마님의 마음을 알았으니 한 달만 기다리십시오...늦어도 한 달 안에 요절을 내겠습니다"
"어떻게 요절을 낼 생각인데 그래 요?"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를 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집 안에서 살인을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요...귀산신묘라는 그 대만을 믿어 볼 께요...왜 아주 벗지를 않고..."
"언제든지 흔적하나 남기지 않고 뛰어나갈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쯧...하기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 짓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마님은 홀랑 벗으란 말입니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마님이 홀랑 벗고 잔다고 트집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만 홀랑 벗고... 총관은 바지만 내린다면..."
"아슬아슬한 맛이 최고라고 해서 일도(一盜)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가슴 두근거리며 몰래 훔쳐 먹는 맛이 일품이란 말입니다"
"호호 호호... 둘이 홀랑 벗고 밤새껏 삑삑 울어 대고 싶은데, 언제나 그렇게 한다지?"
"별채에 있는 젊은 환쟁이 들처럼, 나 죽네 나 죽네 하고 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