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26화
야화 26화
10월 초순.
더위가 한풀 꺾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지도 한참 되었다. 봉이 장주 부인으로 둔갑을 하였고, 내가 총관 귀산신묘 노릇을 하다가 화의 마누라로 둔갑을 하였고, 화는 귀산신묘로 둔갑을 하여 본격적으로 전장 일에 간섭을 하고 참여를 하기 시작 했다.
귀산신묘의 마누라로 둔갑을 한 나는, 장주 부인의 처소를 들락거려도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 낮에는 밀실에서 장주 부인으로 둔갑을 한 봉을 안아 주고 밤이 되면, 귀산신묘로 둔갑을 한 화를 안아 주면 되었다.
귀산신묘로 둔갑을 한 화가, 밤새 나 죽는다고 소리를 쳐도, 그것은 내가 소리를 지른 것이 되었지, 설마 귀산신묘가 소리를 지른 것이라고 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랫것 들을 보기가 민망한 것은 나였다. 나는 밤 낮으로 방망이만 휘두르면 되었다. 그러나 화는 달랐다.
잠영공으로 아랫것들의 그림자 속에 파고 들어가, 아랫것 들의 습성을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일 전장 부인으로 변모를 하여 아랫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장주 부인의 명이라고 전하며, 북경의 빈 땅을 사들이게 하고 재목이란 재목은 있는 대로 모두 사들이도록 하였다.
사들인 재목을 연왕부 부근의 공터에 야적(野積)을 하게 하였고, 이것을 지키는 일은 연왕부의 집사에게 맡겼다... 이런 일련의 지시는, 화의 부친인 안찰사(按察使) 봉충환(鳳忠煥)이 맡아서 했다.
화의 부친인 안찰사 봉충환은 정삼품(正三品)의 당상관(堂上官)이다. 지금으로 친다면 검찰총장이다. 13개 성(省)에서 일어나는 모든 크고 작은 범죄는 일일이 보고를 받게 된다. 그러니 무림의 동태도 봉충환 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 그가 무림의 제일 현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딸인 봉선화도 모르고 있었으나 봉과 나만은 알고 있었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머리도 꼬리도 없는 만사통이라고 하면, 모든 무림인 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런 봉충환이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의 일을 거들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이 만사통이라는 사실만 모르고 있었지, 봉선화가 무림이나 조정의 동태를 환하게 꿰뚫고 있는 것은, 재주 많은 딸 봉선화의 의견을 봉충환이 많이 물어 오고 의논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3년 안으로 북경의 종도성(中都城 = 紫禁城)을 개축할 것이란 것을 알았고, 그렇게 되면 북경이 크게 발전 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토지와 재목을 사들이라고 한 것이다.
나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루 두 끼만 먹고 배만 부르면 되었다. 재화를 산처럼 쌓아 놓으면 뭘 하겠는가... 누워서 한 평, 앉아서 반 평, 서서 두 뼘이면 된다. 재화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다고 해서, 하루 열 끼를 먹는 것도 아니며, 고작해야 누워서 한 평 정도의 땅 밖에는 차지할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닌가.
방망이만 휘둘러 대는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태산의 깊은 산 중에서 사냥을 하던 시절이 그리워지기 시작 했다. 그런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할 봉이 아니었다, 명년 5월이 되면 태산 산속으로 들어 갈 것을 약속 했다.
장주 부인을 섭안공에 걸어 비밀을 캐는데, 무려 반나절 하고도 밤 중까지 캐 내야만 할 정도로 긴 시간이 걸렸다. 독곡을 파악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지하 창고의 열쇠는 장주 부인의 머리에 꽂혀 있는 용봉차(龍鳳叉)였다.
벽면에 뚫린 가느다란 두 개의 구멍에, 두 갈래로 갈라진 비녀를 꽂자 돌 문이 열렸는데. 지하에 가득 찬 금은 보화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없는 것이 없었다 무기며 도자기며 금은 세공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하나만 들고 나가도 세상이 들썩일 것 같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봉선화의 예측 대로 개봉(開封)이 가까운 복우산의 독곡과 사천(四川) 성도(省都) 두 곳에도 이런 지하에 숨겨진 보물 창고가 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워낙 중원 땅이 넓어 한 곳으로 운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두 곳 모두 황금전장 안이 아니라, 산중에 있는 동굴이라고 하였다.
황금전장의 표면에 들어나 있는 재력 보다도 오히려 땅 속에 숨겨진 재화의 가치가 더 클지도 몰랐다. 여인들이라면 옥으로 만들어진 노리개나 장식품을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두 여인은 만져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황!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지요? 답답하고 지루하면 나갔다 와요"
"낄 낄... 처음에는 여자 옷을 입고 여자로 둔갑하는 것도 재미 있더니, 이제는 그 재미도 덜 하구려"
"그럼 아랫것들 정사나 훔쳐 보면 되잖아요"
"그것도 시시해졌소"
"나나 화 동생을 뚫는 것도 시시해졌단 말이에요?"
"그것까지 시시해졌다면 내가 죽었을 것이요"
"태산 산중으로 들어 가고 싶은 것이지요?... 곧 겨울이란 말이에요... 화 동생에게 이야기 해서 한 두 달 앞당겨, 겨울이 끝나 가는 3월쯤 태산으로 가면 안되겠어요?"
"정말 그래 주겠소? 그렇지만 화를 혼자 두고 가려니 마음이 무겁구려"
"열흘에 한 번이나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황이 다녀 가면 될 것 아니에요?"
"이 큰 조직을 화 한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 두 사람은 태산에서 한가하게 사냥이나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소?"
"화 동생은 부친인 안찰사나, 아니면 사부인 천기자와 의논을 해 가면서, 부족한 인력은 적절하게 메워 나갈 사람이에요... 그렇게 정 답답하면 개봉과 성도에 있다는 산중의 장원을 찾아가서 지하에 숨겨진 재화나 확인해 주지 않을래요?"
"두 달 가까이 걸릴 텐데 괜찮겠소?"
"우리야 상관 없지만, 염치없고 주책없는 방망이를 어쩔 생각이에요"
"나야 급하면, 아무나 뚫으면 될 것 아니겠소?"
"아무나 뚫어요?"
"낄 낄... 그냥 해본 소리요... 아무려면 내가..."
"아니에요... 아무나 뚫고 싶으면 뚫어도 좋지만, 시앗은 안 되요... 한 번 만으로 끝나는 상대라면 눈 감아 줄 수도 있어요"
"사천 성도에 있는 것은 폐 장원이라고 하니 문제가 없겠지만, 복우산에 있는 것은 독곡의 무리들이 장악을 하고 있다는데..."
"황이 마음 먹고 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잖아요"
"그러려면, 사람을 또 하나 둘 죽여야 한다는 것이 우울하군요"
"우리가 무림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우리는 짐승이 된 것 아니었던가요"
"알았소... 해를 넘기지 않고, 금년 안으로 돌아 오도록 하겠소"
"이렇게 급하게 떠날 것은 뭐에요"
"하루 늦으나, 지금 가나 다를 것은 또 뭐요"
"잠깐만요... 화 동생의 의견도 들어 보아야지요"
귀산신묘로 둔갑을 하고 전장에 나가 있는 봉선화를 안으로 불러 들여 의논을 하였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봉선화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독곡을 장악할 일이 부담스러웠는데, 이 기회에 언니와 황이 확실하게 독곡을 장악해 주면 좋겠어요?" "어떻게 말이냐?"
"나는 귀산신묘의 아낙으로 변모를 하고 그대로 여기 남아 있을 것이니, 봉이 만독노조의 새로운 제자 역할을 하여, 만독노조의 딸인 적금산의 부인을 뫼시고 독곡에 나타나면 되는 것이지요"
"호호... 부상을 입은 만독노조를, 봉의 부친이 치료해서 살려 낸 대신, 만독노조는 어린 봉을 제자로 키워 낸 것으로 하고, 독곡 본거지로 쳐 들어가란 말이로구나"
"독곡에 가서 시위를 하고, 독곡의 제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귀수독조(鬼手毒爪) 홍택순(洪澤淳)을 완전하게 굴복시켜 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