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51화
야화 51화
10월 초순의 아침 햇빛이 숲속을 뚫고 들어와 산야를 울긋불긋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인간들이 이 속에 낀다는 것이 초대 받지 않은 손님들처럼 보였다.
"오른 쪽 발바닥 좀 보자"
꼬지지한 노인도 자기 오른 쪽 신발을 벗더니 발바닥을 내 보였다. 발 바닥에 세 개의 검은 점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고, 내 발바닥에 박힌 검은 점도 세 개나 있었다. 평소에는 무심하게 보아 넘긴 검은 점이었다.
"흐흐 흐흐... 우리 소씨(蘇氏) 집안의 유전이다... 늬 놈 할아비라는 것을 믿겠느냐?"
"낄 낄 낄...만약 아버지였다면 한 주먹 날리려고 했는데 그나마 할아버지니 다행이구려"
"이런 후레자식을 보았나..."
"후레자식으로 키운 게 누군데 그러시오... 자손 하나 지키지 못하고, 남의 손에서 자라나게 하고는 이제 와서 후레자식이라니...내가 어디서 어떻게 자란지 나 알고 있소?"
"흐흐 흐흐...잘 알지...세살 먹은 네 놈을 소안독심에게 떠 맡긴 것이 이 할아비인데 왜 모르겠느냐"
"어디 그 이유나 들어 봅시다"
"홍무(洪武) 2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18년 전이다. 홍무제가 건국공신들을 반역 죄인으로 몰아 일제히 숙청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죽고 난 후 대명제국의 안위를 염려 했다고는 하지만 그 때 죽어 나간 사람이 3만을 넘었느니라. 네 놈 아비 어미도 그 때 죽었고, 간신히 너만을 빼돌려 살아남은 우리 네 사람은 몸을 피 할 수 밖에는 없었다"
"살아남은 네 사람이라니..."
"귀령자(鬼靈子)인 나와 무영자(無影子) 그리고 우호법인 소안독심과 좌호법인 파안섭영 네 사람은 후일 복수를 기약하고 너를 소안독심의 제자로 내 준 것이다"
"왜 할아버지가 키우지 않았소?"
"좌호법의 제자를 황실의 후손 중에서 길러 내, 음양부의 전설을 실현케 하고 너와 짝짓게 하여, 항실을 피로 물들게 할 생각이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들어 봅시다"
"마교 교주는 항상 금가면(金假面)을 쓰고 다녔는데, 우호법 좌호법 이외에도 귀령자인 나와 무영자 두 사람이 모습을 들어 내지 않고 호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숙청이 시작 되자, 반기를 들려는 무리들을 교주가 억압하기 시작 한 것이다...그래서 마교가 둘로 분열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마교 교주라는 놈은 황실과 연줄이 닿은 놈 같다는 말이다...그것도 사내가 아닌 여인 같다는 것이다"
"아니...측근에 가까이 있었던 네 사람이 그 정체도 몰랐단 말입니까?"
"숙청이 시작 되기 전까지는 의심할 이유가 없었고, 의심을 하기 시작 했을 때는 이미 때를 노친 것이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천면신마란 놈이 마병 제일이라는 은형철삭을 훔쳐 달아나는 것을 발견하고 무영자와 소안독심이 그 뒤를 추격한 것이다"
"낄 낄... 그 뒤는 듣지 않아도 잘 알겠습니다. 천면신마는 또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만독노조가 바로 그 사람이지요"
"뭐야?...지금 뭐라고 했느냐?..."
"만독노조가 바로 천면신마고, 그 실체를 밝히려다가 무영신투가 만독노조의 독에 당해 죽고 말았으니까요"
"뭐 뭐야? 무영신투가 독에 당해서 죽었다고?"
"내가 그 유체를 수습하였고 그 절기를 수득하였으니 틀림이 없습니다"
"아아!.... 무영신투가 누군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냐?... 바로 네 놈 할미니라..." "네 엣?..."
"무영자의 신물은 푸른 옥으로 만들어진 옥적인데..."
"이것 말입니까?"
내가 품안에서 옥적을 꺼내 보이자, 눈곱이 더덕더덕 낀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할멈의 소식을 손자 놈 입을 통해서 들게 될 줄이야... 할멈 소식을 들었으니 이제 여한이 없다... 따라 들어 오너라"
숲을 헤치고 들어가 단애 밑 한쪽 바위틈에 뿌리를 박은 나무 밑둥치에 쌓인 수풀을 헤치니,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 갈만한 구멍이 생겨났다.
"따라 들어 오너라"
기어서 따라 들어가 공주가 품안에서 야광주를 꺼내 드니 동굴안이 환히 밝아지는데 종유석 동굴이었다. 야광주에 비친 종유석이 빛을 반사하는데 별천지에 온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종유석 사이를 빠져 나가니 석실이 있었다.
"어느 분이 여기를 사용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여기를 발견 했을 때는 달마심법과 달마행공이라는 이 비급이 놓여 있었고, 15년간 소림사에 숨어 지내면서 내가 얻어 낸 거이라고는 구품연대(九品蓮臺)라는 이 비급 한 권 뿐이다. 또한 마교의 보물이라는 청홍주(靑紅珠) 두 알과 함께 들어 있던 범문(梵文)으로 된 양피지까지 금합(金盒) 속에 같이 들어 있으니 너희 둘이 알아서 처분 하거라"
"할아버지는요?"
"내 할 일은 다 했다... 엣다, 이것이 내 절기의 전부다. 네 할미의 절기와 내 절기가 어우러지면, 아무도 무시 못할 것이다... 등을 돌리고 돌아 앉거라"
"낄 낄 낄... 공력이라면 넘칠 만큼 몸에 지녔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 터져 죽지 않는다. 또한 저승에 가지고 간들 어디다 쓰겠느냐"
"모처럼 손자를 만났는데, 그러실 수 있는 것입니까?"
"피가 섞였다는 것 뿐이 아니냐... 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너희들 짐이 될 뿐이다...할멈이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다...뭘 하고 있는 게야 냉큼 등을 돌리지 않고..."
"봉! 그대가 등을 돌리도록 하구려... 무영자의 유체와 한 자리에 묻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할멈이 좋아 할 것이다... 손자 며느리에게 내 공력을 넘겨 주는 것도 좋지"
귀령자는 전이대법으로 자신의 공력을 전부 공주의 몸 안에 쏟아 붓고 그대로 좌화(坐化)하고 말았다. 조부라고는 하지만 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성씨가 소씨라는 것을 안 것 만으로도 개 뼈다귀가 아니라는 다행스러운 생각이 있었을 뿐이었고 눈물 한 방울 나지도 않았다. 다만 무영자가 조모였다는 것만은 충격이었다. 인과의 무서움을 알 것만 같았다.
좌화한 시신을 불태워 화장을 해야 하지만, 연기가 피어 오르면 소림사에서 당장 알아차릴 것 같아서 부시독으로 뼈만 남기고 녹인 후 뼈만을 수습하고, 비급을 차례 차례 살펴 보았다. 귀령자의 절기는 몸을 감추는 것이 주된 절기였으며 잠영공과 섞여 사용한다면 그런 대로 훌륭한 절기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잠영공을 모르는 사람이 이 절기를 얻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일세를 풍미할만한 절기였으나, 잠영공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큰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달마심법과 달마행공은 엄청난 절기였으며, 연대구품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범문으로 된 청홍주 두 알과 그 용도를 읽고 난 공주의 얼굴은 붉게 상기 되어 있었다.
"어떤 내용이기에 봉이 그렇게 흥분을 하오"
"이제 우리는 우화등선을 하여 천선지체가 될 수 있을 것이에요... 황은 불 나는 물의 오의를 깨닫게 될 것이에요" "불과 물의 오의(奧義)?"
"물은 산산이 흩어져도 한 방울 한 방울이 오여 들면서 더 큰 물방울이 되듯, 육체가 흩어져도 다시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불사지체가 되는 것이에요...마교가 불을 숭앙하는 분향교(焚香敎)라는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아요... 황은 화마(火魔), 그야말로 불 덩어리가 되는 것이에요" "?...."
"여기에서 백일 연공을 하도록 해요... 동굴 안에서 했던 것처럼, 청홍주를 나눠 먹고 음양 합혼대법으로, 불의 기운과 물의 기운을 서로 백일 동안 주고 받으면 되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