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하지 못하는 일탈 - 1
거부하지 못하는 일탈 - 1
키즈카페에 온 지 30분쯤 지났을까?
입구에서 한 무리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니 첫째 딸 현경의 베프인 주아이와 주아엄마 일행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현경 아버님!“
주아 엄마는 날 보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마 또래의 학부모나 친구들과 같이 온 모양이었다.
주아엄마와는 현경과 주아이가 같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부터 줄곧 봐왔던 사이였다.
더구나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 아이끼리는 물론이고, 아내와도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녀의 나이는 36살로 아내보다 4살 어리지만, 친구가 별로 없는 아내에게는 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절친이었다.
아내의 말로는 주아 엄마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와 함께 미국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다고 한다.
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미국의 IT업체에서 재무관리 팀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내숭이 없고 활달하며 자신감 넘치는 성격이었다.
한편으로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이라서 두 식구가 함께 식사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 자연스럽게 음담패설을 늘어놓아 당황케 하기도 했다.
의상도 대체로 화려하고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나 헐렁한 니트를 좋아하는 듯했다.
오늘도 살짝 타이트한 흰색 원피스에 프랑스 명품 패딩을 입었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겉으로 보이는 털털함과는 달리,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 때문에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재적인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타인보다 자신이 우월하기에 용서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이고, 좋게 표현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 높은 사회적지위를 가진 자가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이런 성격은 사실 여자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이러한 성격은 지능이 높고 탁월한 감각이 있으며 쇼맨쉽도 가지고 있어 리더쉽이 있다.
아마도 유복한 환경에서 큰 어려움이 없이 자랐을 확률이 높다. 다만 연애 관계에 있어서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꽤 순수하게 맹목적인 여인으로 변한다.
즉, 결혼 상대자로서나 연인으로도 매력적인 대상일 것이다.
한편, 남편은 아주 조용한 성격으로 수줍음이 많은 남자였다.
하지만 풍기는 외모는 전혀 반대인 경우로, 키가 크고 평균 이상의 체형에 선 굵은 턱 위로 덥수룩한 턱수염이 자라는, 남성 우월주의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상남자 스타일이었다.
직업 역시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에서 공사 관리 업무를 한다고 했으니, 외모만 보면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도 주아 엄마의 선택에 의한 결혼이었겠지만 그 둘은 부부로서 잘 어울리는 한 쌍임은 확실하다.
"네…. 안녕하셨죠? 주아이는 더 예뻐졌네요!"
나는 수줍은 듯 목뒤로 손을 얹으며 어정쩡하게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에이~ 뭘요. 현경만큼은 아니죠. 미인으로 소문난 은서언니 딸인데 우리 딸이 상대가 되겠어요?"
"아휴~ 아니에요. 주아어머님도 엄청 미인이시죠. 나이도 아직 젊으시고…. 아! 신랑분은 잘 계시죠?"
"네…. 요새 지방 현장으로 발령 나서 당분간은 자주 못 와요."
"아~. 그렇구나. 요새 주택 건설이 많아서 엄청 바쁘실 거예요."
"그런가 봐요. 그나저나 일전에 스키장 초대해 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주아이는 그 이후에도 또 가자고 졸라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년에도 또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하. 좋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 또 기회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우리 식구도 주아이네 가족하고 같이 가니 다들 너무 좋아하던데요?"
"정말요? 빈말 아니시죠? 녹음해 놔야 하나? 아! 맞다 그때 현경 아버님 엄청나게 고생하셨죠? 아이들 스키 가르치랴 뒤치다꺼리하랴. 덕분에 은서언니랑 저는 현경 아버님이 주신 쿠폰으로 온천에 마사지 잘 받고 편했지만, 한편 아주 죄송하더라고요. 언제 한 번 신세 갚아드려야 하는데….""사실 그거 그냥 내 돈 주고 끊어 온 거야. 그걸 샀다고 하면 마누라가 바가지 긁을 게 빤하니 거짓말한 거지.‘
"하하. 뭘요~. 신세랄 것도 없습니다. 저도 후배한테 그냥 얻은 건데요. 잘 쉬셨다니 제가 감사하죠. 그리고 전 애들하고 노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나저나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거 아닌가요? 친구분들께서 기다리실 거 같은데….""아차! 그러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뵈어요."
"네, 어서 가세요."
난 일부러 앉은 상태에서 인사를 하고는 다시 아이패드로 눈을 돌렸다. 왠지 주아엄마와 같이 온 일행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한 30분 정도 흘렀을까? 이제야 슬슬 숙취가 내려가는지 담배도 땡기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키즈카페 입구에서 아까 봤던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난 당연히 미소를 살짝 머금고 눈인사를 하려 했는데,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현경 아버님... 저….""네? 무슨 일이죠?"
"잠시 저랑 얘기 좀….“알바생은 주눅 든 표정으로 움츠러든 몸짓으로 날 살짝 잡아끌듯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상가 모퉁이에서 멈춰 말을 이었다.
"저기... 후~ 휴…."그녀의 하얀 손끝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진정하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등을 매만졌다.
"우리 아이가 뭐 잘못했나요? 괜찮으니 편히 말해 보세요."
난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낮은 톤으로 편안하고 느리게 말을 건넸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까 오신 분들 때문인데요."
"아~ 주아 어머니 말씀이세요? 그분들이 왜요?"
"그러니까….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되어서요."
"뭔데요? 편히 얘기해도 돼요. 얘기한다고 선생님께 문제 생기지 않을 거예요. 편히 말씀해 주세요."
"네…. 실은 그분들 얘기를 엿들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같이 오신 분 중에 아버님을 아는 분이 계신 것 같아요."
"네? 그래요? 저는 신경 써서 보지 않아 잘 모르겠던데….""그분도 처음에는 어디서 봤는지 잘 기억을 못 하다가, 예전에 사귀셨다고…. 주아 어머니께서 현경 아버님에 대해 성격 좋은 분이고, 나이며, 직장이 어디고, 학교는 어디 나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아! 맞다 하면서 옛날에 그분이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남자가 현경 아버님이었대요."
난 그녀의 이야기에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누굴 말하는 것인지, 전혀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