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의 여인 - 4
가을날의 여인 - 4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나는 ‘라면집’과 ‘강변찻집’을 찾았습니다. 작별을 고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의미 있는 가을을 보냈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상수씨로 해서 올 가을이 좋았어요.....................”
“이... ‘강변찻집’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을 겁니다..................”
“그럼... 다시는 부산에 올 일이 없나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다시 오도록 노력은.....................”
“아니... 노력까지는..........................”
‘강변찻집’에서 그렇게 작별의식을 치른 나는 ‘라면집’으로 갔습니다. 멜빵 아저씨는 처음 그때의 그 모습으로 나를 맞았습니다. 멜빵바지, 긴 장화, 담배 파이프, 그리고 무표정 그 모든
것이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혹시... 다음에 또 여기 올 수 있어?......................”
“글쎄요... 다시 오려고 노력은 하겠습니다만...........................”
“담에 올 때는 호호라면을 같이 먹을 처자와 같이 와... 강변 그 여편네는 아냐...................”
서울로 돌아온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동분서주 했습니다. 그러던 사이 그해 가을은 점점 물러서고 있었습니다. 가로수의 낙엽이 거의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가 오소소 추위에 떨 무렵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다니던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려면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촬영장소가 필요했고 그 장소 헌팅을
위해서 그 학교의 영상자료실을 찾았던 것입니다. 나는 자료실에서 ‘가을’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영화들을 골라냈습니다. 그 골라낸 영화중에는 ‘만추(晩秋)’ 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내가 골라낸 ‘만추’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무렵인 1960년대 초반에 제작된 영화였는데 물론 흑백이었고 이만희 감독의 작품이었습니다. 나는 그 영화를 학교 다닐 때 바로 그 영상
자료실에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영화 ‘만추’ 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 이만희 감독의 ‘만추’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작품성이 떨어집니다. 리메이크
된 영화는 칼라였지만 흑백인 이만희 감독의 영화보다 영상미가 훨씬 떨어집니다. 리메이크 영화는 당시 내노라하는 여배우가 출연하지만 흑백영화의 ‘문정숙’ 이라는 여배우의 심오한
연기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리메이크 된 영화의 시나리오를 각종 영화제에서 시나리오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가 각색했지만 전문 작가가 아닌 이만희 감독이 쓴 오리지날 시나리오가
훨씬 문학성이 높습니다. 나는 그 ‘만추’ 영화의 필름을 영사기에 걸었습니다.
첫 장면 화면 가득히 낙엽이 떨어집니다. 이어서 카메라는 낙엽 떨어지는 어느 공원을 멀리서 비춥니다. 벤치의 한 켠으로 어떤 여인이 앉아 있고 멀리서 청소부 할아버지가 낙엽을
쓸면서 여인 곁으로 다가옵니다. 카메라는 천천히 줌업(Zoom up)하여 여인의 모습을 점점 크게 잡습니다. 여인은 바바리코트 차림이었으며 코트의 깃을 올리고 있고 긴 머리가 코트 깃
위로 흘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머플로로 얼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이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가벼운 전율을 느껴야했습니다. 영화화면에 ‘강변의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수에 젖은 영화 속 여인은 강변의 그녀와 너무 닮아있었습니다. 가을
내음을 풍기는 인상 서늘한 눈매와 고르고 하얀 치아 약간 각이 있지만 그게 오히려 이지적으로 보이게 하는 턱선 ‘영화 속 여인’과 ‘강변의 그녀’는 모두 이 같은 인상과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내가 강변의 그녀를 처음 대했을 때 그녀가 전혀 생소하지 않았던 이유 어디서 많이 마주했던 느낌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해 여름이 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일에 쫓기느라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가 보고 싶었습니다. 부산사무소에 근무할 명분을 만들고
서울의 그녀에게 졸라대고 하여 나는 기어이 부산사무소 근무 발령을 얻어내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나는 숙소에 대충 짐을 정리하고 강변찻집을 바로 찾았습니다. 그녀는 나를 매우
반겼습니다. 얼굴에 좀처럼 띄지 않던 홍조를 띄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난 축제를 해야죠?........................”
“축제?... 어떻게?.....................”
“우리... 을숙도 갈대밭에 가요... 나룻배 타고.......................”
“지금은 볕이 너무 뜨거울 텐데... 아직 가을이 온 건 아니잖아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강이 있고 갈대가 있는데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나룻배를 같이 탔습니다. 귀가 먼 뱃사공 할아버지는 노를 저어 배를 띄우기 전에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뱃사공 할아버지는 귀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말도 하지 못
했습니다. 수화로 그녀와 대화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죠?......................”
“호호... 상수씨가 누구냐고 묻고 있어요.....................”
“그래서요... 누구라고 했어요...................”
“우리... 훈이를 예뻐해 주는 나의 남자친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요?.....................”
“아주 좋은 사람 같다고 하시네요...................”
우리가 강을 건너 을숙도에 도착한 건 오후 세시쯤이었습니다. 햇볕이 한 여름 못지않게 따가웠습니다. 갈대밭은 배에서 내리자 바로 펼쳐졌습니다. 우리는 갈대를 헤쳤습니다. 앉아서
얘기를 나눌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몹시 덥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녀에게서 따가운 햇볕을 차단시켜줄 어떤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나는 키가 아주 큰 갈대로
우거진 어떤 장소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내가... 간이 원두막을 지어드릴게요....................”
“어떻게 원두막을......................”
“두고 보세요......................”
나는 갈대 수 십 그루를 바닥에 뉘었습니다. 평평한 자리가 마련되었고 그 자리는 사방으로 갈대가 우거져있었습니다. 나는 어느 한쪽 갈대와 반대편 갈대의 끝자락을 묶어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그렇게 묶어나가자 그 평평한 자리에는 지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갈대로 묶은 지붕은 얼기설기 했지만 제법 지붕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햇볕을
가려줬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갈대 지붕의 조그만 원두막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조금의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때요?... 훌륭한 원두막이죠?........................”
“누가... 지은 원두막인데.....................”
“좀... 시원해요?......................”
“예... 많이 시원해요... 상수씨 마음이 햇볕을 가려주어서 그런가 봐요........................”
우리는 그곳에서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원두막에 햇볕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원두막 안이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이어서
후두둑 소리가 들렸습니다. 빗방울이 갈대지붕을 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올 것 같아요... 우리 돌아가요?.....................”
“소나기인데... 좀 있으면 그치겠죠..................”
“아녜요.... 곧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아요... 한 여름 소나기가 아니잖아요.................”
“그렇더라도... 배가 있어야 강을 건너죠....................”
“강둑에서 손을 흔들면... 뱃사공 할아버지가 와요......................”
그녀와 나는 강둑에 서서 팔을 들어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강 건너 보이는 나룻배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졌습니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밤에 갈대밭을 찾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텐데 그때는 어떤 방법으로 뱃사공에게 신호를 보내느냐는 궁금증이었습니다.
“밤에는 어떻게 뱃사공에게 신호를 보내죠?....................”
“갈대 몇 잎에 불을 붙여 흔드는가 봐요.......................”
뱃사공 할아버지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얼굴의 빗물을 훔치며 말했습니다.
“안 되겠어요... 우리 저리로 가 봐요... 비를 피할 곳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래야... 되겠네요....................”
우리는 빗속을 헤치며 강둑을 걸었습니다. 강둑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강둑을 걸었습니다. 그녀의 옷은 빗물로 흠뻑 젖었습니다. 옷의 엷은 천이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나신(裸身)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잘록한 허리의 곡선 육감적으로 흘러내리는 등허리 조금은 크다 싶을 정도의 엉덩이 그 엉덩이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노란색 팬티 이러한 것들은 나의 욕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달래나 보지’의 전설에 등장하는 남매가 생각났습니다. 약초를 캐러 산에 갔다가 소나기를 만난 남매는 그날의 우리처럼 옷이 빗물에 온통 젖었습니다. 그 전설 속의 남동생이 꼭 나와
같은 욕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야말로 온갖 노력을 다하여 끓어오르는 욕정을 지워내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욕정을 느낀다는 것은 곱고 그리고 신성하기
까지 한 그녀에게 구정물을 끼얹는 모독적 행위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찬 빗줄기를 헤치며 강둑을 걸은 것이 십여 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갈대를 걷어낸 공터가 보였고 거기엔 어떤 음료회사의 비치파라솔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비치 파라솔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미 맞을 만큼 다 맞은 비였고 이미 젖을 만큼 다 젖은 옷이었지만 그녀에게 우선 안도감을 주기 위하여 그렇게 비치파라솔을 받쳐 들었던 것입니다. 그녀와 나는 그
비치파라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녀 뒤에서 비치파라솔을 받쳐 들고 걸었습니다. 그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으며 그녀의 젖은 몸에서 발산
되는 체취가 내 후각을 자극했습니다. 그 체취는 씀바귀를 삶을 때 나는 내음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육신을 뒤에서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억제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거리만큼 더 걸었을 때였습니다. 어떤 청년이 보였습니다. 그 청년은 영화 ‘티코’에
나오는 청년처럼 벗어재낀 윗 몸에 조개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손에는 낚시도구 같은 게 들려져 있었습니다.
“가겟방 찾는교?..................”
“그래요... 여기에도 가게가 있나요?......................”
“그라믄... 날 따라 오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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