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현 부계정 파문'보다 중요한 폭로자의 정체
토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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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9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신인 김서현(19)이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 photo 한화이글스
법적으로는 피해자인데 사회적으로 질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다. 몇 년 전 한국 연예계를 발칵 뒤집었던 남자배우의 휴대전화 해킹 사건이 그랬다. 해당 배우가 사용하는 클라우드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유출되면서 민감한 개인정보와 사진, 지인들과 나눈 문자메시지 내용이 협박범의 손에 들어갔다.
몇몇 커뮤니티를 통해 유포된 문자 내용에는 유명 배우와 나눈 여성비하 발언, 성적인 대화, 비동의 촬영물 등이 포함돼 충격을 줬다. 해당 배우는 물론 함께 거론된 여러 남자배우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고 모든 연예 활동을 중단했다. 분명 해킹으로 사생활이 유출된 피해자였지만 해킹범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비슷한 일이 한화 이글스 신인투수 김서현에게도 일어났다. 김서현은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가 시작하자마자 비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지난 1월 서산 신인 훈련 기간에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부계정에 올린 코치, 팬 대상 '뒷담화' 게시물이 야구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논란이 됐다. 구단에서 사실 관계를 확인한 결과 김서현 본인 계정이 맞았다. 한화는 고심 끝에 김서현에게 3일간 훈련 제외와 벌금으로 징계를 대신했다.
징계가 끝난 뒤 김서현은 선수단과 취재진 앞에 서서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선배들에게는 숙소 방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눈물의 사과에 비난 여론이 조금은 수그러들었지만 이미 일주일간의 집중포화에 초토화가 된 뒤였다. 전체 1라운드 특급 신인이 데뷔도 하기 전부터 '스크래치'가 난 셈이다.
김서현 파문은 일단락됐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A구단 관계자는 "김서현이 SNS에 올린 글은 분명 잘못이 맞다. 하지만 이번처럼 일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두들겨 맞고 훈련장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방송으로 생중계할 만큼 큰일인지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문제의 글에는 반사회적인 내용이 담긴 것도 아니다. 나이 어린 선수가 뒤에서 투덜대는 수준이었다. 앞선 관계자는 "옛 속담에 '안 보이는 데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고 하지 않나. 당장 휴대폰 열면 누구나 가족, 친구와 그 정도 불평불만은 주고받은 기록이 있을 것이다. 갈수록 선수들에게 작은 인간적 결점이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로 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솔직한 의견을 말했다.
3만 팔로어 거느린 야구계 '요주의 인물'
B구단의 홍보팀 관계자는 "프로에 입단한 신인 선수들은 만 18~19세로 어린 나이다. 친구들과 실없는 얘기와 농담,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을 주고받는 고교생에서 하루아침에 대중의 이목이 집중되는 유명인이 된 것"이라며 "프로선수라는 자각과 책임감을 갖고 자신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남들에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 더 신중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조언했다.
사실 김서현 SNS 논란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김서현의 부계정 글이 외부로 알려진 건 스스로를 '피칭 애널리스트'라고 자처하는 A씨의 SNS를 통해서다. A씨는 팔로어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김서현의 부계정 게시물을 캡처한 이미지를 공개했다. 이게 커뮤니티로 퍼지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김서현은 사적 공간이 원치 않게 노출된 피해자이지만 모든 비난의 화살은 김서현 개인에게 쏠렸다.
A씨는 이전에도 야구선수, 야구인, 구단과 관련해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게시물을 자주 올렸다. 리그 에이스급 투수는 물론 감독, 코치, 해설위원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과 폭로를 해왔다. 야구계 뒷이야기에 목마른 일부 야구팬 중에 A씨를 추종하는 이들이 생기면서 3만 팔로어를 보유한 '인플루언서'가 됐다. 특히 최근 들어 몇몇 스타 선수를 겨냥한 폭로와 비난, 협박 예고 게시물을 집중적으로 올리면서 야구계 '요주의 인물'이 됐다.
법조인 출신의 모 구단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구단 차원에서 A씨를 주시해 왔다"면서 "명백히 허위인 내용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SNS에 게시해서 우리 구단 구성원이 피해를 입었다. 최근 들어 보니 피해자가 우리 구단에만 있는 게 아니라 거의 전 구단에 있는 것 같더라"고 밝혔다.
또 다른 구단 관계자는 "해당 계정에서 폭로한 내용 중에 사실로 드러난 건 김서현의 SNS가 유일하지 않나. 그것도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제보'받은 이미지로 알고 있다. 다른 폭로는 대부분 확인이 불가능한 내용이거나 과장된 것, 혹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라며 "우리 구단 외에 다른 구단과 선수들도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2017년 한화 김원석은 소셜미디어에 코칭스태프와 팬 등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팀에서 퇴출당했다. photo 뉴시스
"뒷담화 유도한 뒤 약점 잡는 경우도"
A씨에 관해 개인적으로 조사해 왔다는 한 야구인은 "피칭 전문가라고 주장하는데 이 사람이 과거에 야구를 했는지, 실제 지도 경험이 있는지, 공개한 신상이 진짜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미국 국적이고 아버지가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는데 그조차도 사실인지 불분명하다. 직접 만났다는 선수들도 나이가 몇 살인지 정확하게 모른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A씨는 몇 년 전부터 SNS를 통해 중·고교 아마야구 선수들과 학부모에게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하는 과학적 훈련방법, 최신 트레이닝을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접근해 레슨을 진행했다. 신뢰를 얻기 위해 해외에서 취득했다는 코칭 자격증을 제시하고, 유명 선수와의 친분을 과시했다는 증언도 있다.
한 스포츠 에이전시 관계자는 "선수들 얘기를 들어보니 처음에는 무료, 혹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금액으로 레슨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더라. 그러다 점점 레슨비를 요구했다고 들었다. 1개월에 수백만원에 달하는 고액을 요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며 "금액 때문에 혹은 레슨 방식이 맞지 않아서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협박이 시작된다. 그동안 서로 나눈 개인적 얘기를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으로 안다. 이런 식으로 당한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앞선 A구단 관계자는 "선수가 맞대응하고 싶어도, 워낙 예측 불가능한 상대다 보니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참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프로 선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반인에게 레슨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망신을 당할까봐 쉬쉬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이따금 유명 연예인들이 사기, 협박 피해를 당하고도 이미지 실추가 두려워서 공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선수들에 따르면 A씨 쪽에서 의도적으로 '뒷담화'를 유도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SNS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감독, 코치, 동료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 때까지 끈질기게 유도했다는 것이다. '나한테는 다 말해도 된다'는 식으로 험담을 유도한 뒤에 이를 선수의 약점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A구단 관계자는 "A씨의 폭로는 공익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개인 악감정에 따른 보복성 성격을 갖는다. 유튜브에서 악명 높은 사이버 렉카(이슈가 생길 때마다 짜깁기 영상을 만들어 조회 수를 올리는 유튜버)들이 하는 짓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A씨의 '피칭 애널리스트' 활동과 무차별 폭로는 조만간 법적 대가를 치를 전망이다. 사단법인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회장 김현수, 이하 '선수협')는 선수들의 잇따른 피해 호소에 협회 차원에서 대응에 나섰다. 1차 전수조사를 진행한 선수협은 지난 2월 15일 '자격증 사칭 야구 레슨에 주의하라'는 공식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선수협은 "최근 해외에서 취득할 수 있는 코칭 수료증을 마치 공식적인 자격증인 것처럼 사칭하며 본인을 소개하고 직접 코칭을 하거나 영상을 판매하는 활동을 포착했다"며 중·고교 야구선수는 물론, 프로야구 선수들도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장동철 선수협 사무총장은 "본인의 신분을 정확히 밝히지 않은 채 해외에서 취득한 공식 코칭 자격증을 내세우거나, 지나치게 프로야구 선수와의 친분을 과시한다면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외에서 취득한 수료증을 마치 공식적인 자격증인 것처럼 소개할 경우 그 진위 여부를 바로 확인하기가 어렵다"며 "프로의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은 선수나 학부모의 마음이 이용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조금이라도 의심의 마음이 든다면 충분히 확인한 후에 결정을 하는 것이 피해를 입지 않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선수협, 아마추어 선수 제보 창구 개설
선수협은 피칭 애널리스트로 인한 피해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조만간 스프링캠프 현지에서 2차 전수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또 중·고교 선수를 포함한 아마추어 선수들의 사례도 모아 선수협 고문변호사를 통해 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다. 아마추어 선수와 일반인 대상 제보 창구도 열었다.
조숭희 변호사는 "현재까지 드러난 A씨의 행태를 보면 법적으로 문제될 소지가 많다"며 "레슨을 중단하겠다는 선수에게 폭로하겠다고 협박해서 돈을 받았다면 공갈, 협박당한 선수가 돈을 주지 않았다면 공갈미수에 해당한다. 또 개인적 대화나 사생활을 폭로한 건 정보통신망법에 따른 명예훼손과 모욕죄가 성립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앞선 법조인 출신 구단 관계자는 "A씨가 레슨을 진행하면서 현금영수증은 제대로 발행했는지, 세금은 납부하면서 레슨장을 운영했는지도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김서현 선수가 잘못은 했지만, 김서현 하나만 두들겨 맞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선수에게 악의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행태를 끝까지 추적해 처벌받게 해야 한다. 팬들도 선수에 관한 무분별한 비난과 폭로에 호응하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