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가 불러 온 MLB 직행 논란
토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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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4
지난 12월 15일(현지시간) 이정후가 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오라클파크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입단식을 마친 후 경기장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바람의 손자' 이정후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입단은 한국 야구선수의 미국 진출 역사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이정후는 지난 7년간 KBO리그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섰다. 타격 5관왕, 골든글러브, MVP, 올스타, 국가대표까지 프로야구 선수로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록과 영광을 한 몸에 누렸다.
한국야구 최정상급 스타 이정후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 이정후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계약 조건은 6년 총액 1억1300만달러. 원소속팀 키움 히어로즈가 받을 이적료까지 합한 총액은 무료 1억3200만 달러에 달한다. 애초 포스팅 신청 당시 전문가들이 예상한 '5000만달러'와 비교하면 두 배가 훨씬 넘는 거액이다. 역대 한국인 메이저리거는 물론 일본프로야구 출신 타자들과 비교해도 월등히 좋은 조건에 계약을 맺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이정후에게 내년 시즌 주전 중견수 겸 리드오프 역할을 맡길 계획이다. 자이언츠는 이정후의 천부적인 컨택 능력과 뛰어난 운동 능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여기다 이정후의 스타성에도 큰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이정후는 지난 12월 15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 오라클파크에서 열린 입단 기자회견에서 영어 인사말과 위트 있는 농담으로 미국 취재진의 폭소를 끌어냈다. 당시 자리를 함께한 이정후 측 관계자는 "기자회견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고 전했다.
KBO 거쳐서 가는 성공방정식이 정답?
이정후의 대형 계약 소식이 전해진 뒤 한 KBO리그 구단 관계자는 "만약 이정후가 휘문고 졸업 후 바로 미국에 갔다면 지금처럼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겠나"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 관계자는 "고교 유망주들이 바로 미국에 진출해서 성공한 사례가 몇이나 있나. 오히려 류현진, 김하성, 이정후처럼 KBO리그를 거쳐 미국에 간 선수들이 크게 성공했다"며 "혹시라도 미국 진출을 생각하는 야구 유망주와 부모가 있다면 잘 생각해볼 문제"라고 주장했다.
모 메이저리그 구단의 아시아담당 스카우트도 비슷한 고민을 토로했다. 이 스카우트는 "고교 시절 이정후가 미국야구에서 바로 데려갈 정도로 좋은 유망주였나고 물으면 답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면서 "당시만 해도 체격조건이나 힘, 스피드 면에서 미국에 갈 만큼 특출 나진 않았던 기억이다. 하지만 KBO리그에선 바로 첫해부터 1군 무대에 적응해 활약했고 매년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만약 미국에 직행했다면 지금 같은 선수가 되진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실제 최근 미국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고 좋은 계약을 따낸 선수들은 대부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진출한 선수들이다. 2012년 LA 다저스와 6년간 총액 3600만달러에 계약한 류현진을 시작으로 강정호(피츠버그 파이리츠, 4년 최대 1400만달러), 박병호(미네소타 트윈스, 4+1년 총액 1850만달러),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 4+1년 총액 3900만달러) 등의 성공 사례가 대표적이다.
반면 고교 졸업 후 직행 선수 중에선 최근 들어 성공 사례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최근 5년간 미국 직행 선수 가운데 빅리그 주전급으로 올라선 사례는 2023시즌 피츠버그 파이리츠 외야수로 활약한 배지환 정도밖에 없다. 2014년 116만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 박효준은 야탑고 시절 김하성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유망주였지만 메이저리그에 두 시즌밖에 머물지 못했다. 이대은, 이학주 등 한때 고교 최고 유망주였던 선수들도 빅리그 입성에 실패해 KBO리그로 돌아왔다. 고교 유망주의 미국 직행에 반대하는 쪽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근거다.
2014년 고교 야수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박효준(왼쪽)은 116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다. photo 뉴시스
마이너리거 처우 개선도 직행에 한몫
반면 무작정 고교생의 미국 직행을 반대하기보단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포스팅과 미국 직행은 각기 장단점이 있다. 선수에 따라, 그리고 투수냐 타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본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 등 선수의 성향도 중요하다"면서 "어느 쪽이 옳다고 하기엔 아직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는 의견을 내놨다.
다른 에이전시 관계자도 "포스팅을 통한 미국 진출은 이미 KBO리그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극소수의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다. 이미 정상에 오른 선수들의 성공률과 미지의 유망주들이 성공한 사례를 단순 비교할 순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 이 관계자는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KBO리그에 입단한 선수 가운데 5년 이후에도 현역 선수로 남아있는 선수 비율은 10%도 되지 않는다. KBO리그에 진출한다고 반드시 살아남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오히려 과거엔 미국에 직행해서 성공한 선수가 많지 않았나. 무조건 포스팅이 정답이라고 단순화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박찬호의 성공 이후 한동안 미국 구단들이 한국 아마추어 유망주를 무차별적으로 스카우트한 시절이 있었다. 싹수가 보이는 유망주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미국부터 보내는 행태로 인해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한 MLB 스카우트는 "당시만 해도 메이저리그 구단의 국제 아마추어 계약금에 상한선이 없었다. 100만달러 이상의 거액 계약금을 주고 데려가는 사례가 꽤 많았다. 선수나 부모들도 당장의 거액에 마음을 뺏겨 미국행을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마이너리그의 선수 육성 시스템은 그렇게 체계적이거나 세련되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미국 땅을 밟은 유망주들은 언어와 문화 장벽에 부딪혔다. 지도자의 개입이 많고 타율적인 야구 문화에서 자란 국내 선수들은 미국야구의 '방목형'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성공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빅리거의 꿈을 접고 초라하게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의 선수 육성 시스템이 발전한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MLB 구단과 자주 교류하는 구단 관계자는 "마이너리거가 '눈물 젖은 빵'을 먹는다는 건 다 옛날 얘기"라며 "최근 들어 마이너리거들에 대한 처우와 환경이 크게 개선됐다. 숙소와 식단은 물론 최저연봉도 대폭 인상됐다. 한국에서 온 선수들은 구단에서 개인 통역까지 붙여 준다. 과거의 마이너리그 생활과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이라고 했다.
마이너리그 단계도 기존 7단계에서 5단계로 단축돼 이른 빅리그 데뷔가 가능해졌다. 마이너리그 팀과 선수 수를 줄이는 대신 '진짜 유망주'만 남겨놓고, 이 선수들을 과학적인 훈련 프로그램으로 최대한 빨리 메이저리거로 만드는 시스템이다. 앞의 에이전시 관계자는 "과거엔 23~24세는 돼야 빅리그 진입이 가능했지만 최근엔 21~22세의 어린 선수가 일찌감치 빅리그에 데뷔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또 메이저리그에서 실력을 보여준 선수는 FA가 되기 전에 장기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과거보다 마이너리거들에게 훨씬 좋은 기회의 문이 열린 셈"이라고 했다.
일부 구단은 아시아 출신 선수들에게 미국 대학 유학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한 MLB 스카우트는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 몇몇 구단은 대학교, 대학원 4년 전액 장학금을 외국 출신 선수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이 장학금은 국제유망주 계약금 한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미국야구의 선진 시스템을 경험하고, 영어를 배워 스포츠계에서 일해보고 싶은 꿈이 있는 선수라면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제도"라고 했다. 메이저리거를 꿈꾸는 선수가 아니라도 미국 무대에 도전할 만한 유인이 충분하다는 얘기다.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스포츠계 문화, 국내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도 선수와 학부모가 미국행을 선호하는 이유로 거론된다.
"대만 모델 대신 일본 모델로 가야"
과거 소속 선수 여러 명을 미국 구단에 보낸 경험이 있는 고교 지도자는 "한국야구가 발전하려면 미국야구를 일찍 받아들이고, 선진 야구를 경험한 선수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이 지도자는 "대만 같은 경우 고교 졸업생 가운데 미국에 직행하는 선수가 상당히 많다. 이 선수들 대부분이 국제대회 때 대만 대표팀에 합류해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다"면서 "물론 메이저리그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들이 돌아와 자국 리그에서 활약하거나 지도자로 변신해 대만 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대만야구가 최근 눈부시게 발전한 것도 미국야구를 경험한 선수들의 영향"이라고 했다.
다만 미국에 다녀와도 별다른 페널티가 없는 대만과 달리, 한국은 '미국 구단과 계약 해지로부터 2년간 한국 프로구단에 입단할 수 없다'는 유예조항이 선수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여기다 소속 선수를 미국에 보낸 고교팀은 5년간 KBO에서 나오는 지원을 받지 못하는 족쇄도 있다. 이와 관련해 앞의 에이전시 관계자는 "지금 제도에선 미국에 진출했다 실패하면 2년을 기다려야 KBO리그에서 뛸 수 있다. 재능 있는 선수들의 전성기를 그냥 썩히는 일이다. 이건 한국야구로서도 큰 손해다"라고 지적했다.
앞의 고교 지도자는 "어차피 아무리 제재해도 선수들의 미국 진출을 완전히 막을 순 없다"고 지적했다. 메이저리그 데뷔가 빨라지고 마이너리그 환경이 좋아진 만큼 앞으로도 매년 유망주의 미국행이 계속될 거란 지적이다.
한 야구 관계자는 "과거의 한국야구가 대만 모델에 가까웠다면, 앞으로는 일본 같은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대만은 자국 프로리그의 수준이 높지 않고, 대우가 열악해 특급 유망주 대부분이 미국을 선호한다. 과거 KBO리그도 비슷했다. 반면 수준 높은 자국 리그를 보유한 일본에서는 유망주가 고교 졸업 후 미국에 진출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면서 "일본처럼 자국 리그가 매력적이고 경쟁력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면, 미국으로 직행하는 고교 선수는 자연히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교 유망주의 미국 도전을 무작정 반대하고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KBO리그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우선해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