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평가요? 저는 과대평가된 슈터입니다”
토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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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5
[김종수의 농구人터뷰(43)] ‘캥거루 슈터' 조성원
앨런 아이버슨은 다양한 개성파 선수들이 즐비한 NBA 역사에서도 특별한 선수로 꼽힌다. 신장은 183cm에 불과했지만 질풍같은 스피드와 다양한 테크닉을 통해 리그 최상급 스코어러로 명성을 떨쳤으며 최단신 득점왕, 최단신 MVP라는 확실한 결과물까지 만들어냈다. 아이버슨의 대활약은 전 세계 수많은 단신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그가 남긴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면 ‘KBL판 앨런 아이버슨은’에 가장 가까운 선수는 누구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조성원(51‧180cm) 전 창원 LG감독을 꼽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슈팅가드, 스몰포워드 포지션에서 뛰었던 선수치고 매우 작은 사이즈를 가졌지만 폭발적인 공격력만큼은 토종선수 중 역대 최상위권을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농구인들 사이에서는 조성원에 대해 과소평가됐다는 얘기도 많이 나온다.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짧지만 굵은 기록을 KBL 역사에 남겼다. 9시즌을 뛰며 정규리그 432경기에서 총 6,402득점(3점슛 1,002개), 656리바운드, 912어시스트, 514스틸, 56블록슛을 기록했다. KCC에서는 왕조의 한축으로 활약하며 3번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LG시절에는 팀내 주포를 맡아 정규리그 MVP까지 거머쥐었다. 무엇보다 승부처, 큰 경기 등에 강해 승부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손끝에서 갈리는 승부가 워낙 많았던지라 응원팀 팬들에게는 히어로, 상대팀 팬들 입장에서는 악마같은 선수였다.
본인도 밝혔다시피 조성원은 약점이 많았다. 180cm의 신장은 스윙맨으로 뛰기에 경쟁력이 한참 떨어졌다. 사이즈만 봤을 때는 1번 포지션이 어울려 보였으나 늦게 농구를 시작한 탓에 볼컨트롤, 패싱테크닉 등도 부족해 그럴 수도 없었다. “방법은 슛밖에 없었습니다. 이것 아니면 죽는다고 생각했죠”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살아남기 위해 슛을 갈고 닦았고 리그내 쟁쟁한 장신슈터들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엄청난 슛쟁이로 위용을 떨쳤다.
현역 시절에도 그랬지만 슈터 조성원은 겸손함이 몸에 배여있다. 이충희, 문경은 등과 함께 누구나 인정하는 역대급 슈터임에도 ‘저보다 슛 잘던지는 선수는 넘쳐났습니다’라는 말로 늘 자신을 낮춘다. 어쩌면 그러한 성격을 가졌던 탓에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을 거듭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공격 농구가 하고 싶었는데 수비에서 더 결과물이 좋더라고요”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에는 그냥 쉬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특별한 계획같은 것은 없고요. 잠깐 휴식의 시간을 가지면서 이것저것 천천히 생각해봐야죠. 빡빡했던 일정 때문에 지인들도 잘 못 만나고 그랬는데 요즘은 여유있게 만남도 가지면서 간만에 슬로우템포를 즐기고 있습니다. 농구는 빠른게 무조건 좋은데 일상은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은 것 같네요. 그래도 마냥 여유를 즐길 수는 없고 뭔가는 해야겠죠. 처자식도 있으니까 먹여는 살려야되잖아요.(웃음)
Q.현장을 떠나신지 얼마되지 않아서 몸이 근질근질하실 것 같아요.
하하핫…,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덜 근질근질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요 몸의 반응이 느려요. 현역시절 같았으면 며칠만 쉬워도 몸이 근질근질했을 텐데 나이 먹으니까 천천히 오네요. 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급하지 않게 보되 확실히 들어오는 것은 제대로 보려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재충전 기간이라고 할 수 있죠.
Q.김태환 감독의 LG시절 공격농구의 선봉에 셨잖아요. 공격 성향이 강한 이관희, 이재도를 통해 그러한 농구를 재현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꼭 노리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농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선수로서도 팀적으로도 화끈하게 잘나갔던 시절이잖아요. 그런데 다들 김태환 감독님의 LG시절 농구를 ‘외곽슛 농구’라고 생각하시는 경향이 많더라고요. 3점슛 비중을 확 높여서 상대를 압박하는 한편 저와 에릭 이버츠 거기에 (조)우현이, (이)정래 등 슈터 자원이 워낙 많아서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기실 핵심은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득점 쟁탈전에서 앞서 나가는 화력 농구는 맞지만 주는 외곽슛이 아닌 스피드였죠. 상대가 전열을 갖추기 전에 빠르게 공격하고 다시 수비로 전환하는…, 김태환 감독님이 추구하는 농구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3점슛도 톡톡한 옵션으로 작용했고요. 제가 외곽슛이 좋다고는 하지만 발이 느렸다면 중용 받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만큼 당시 감독님의 기조는 ‘빠르게, 더욱 빠르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그런 농구를 좋아하기도 하고 지도자로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사실 이재도 영입은 당시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수를 데려온 의미가 커요. 발이 빠르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꼭 데려오고 싶어서 구단에 요청을 했는데 들어주셔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하지만 의외로 공격보다는 수비에서 더 결과가 좋았어요.
본래는 공격 농구를 추구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수비에서도 강점을 발휘하게 되더라고요. 좋은거잖아요.(웃음) 팀 내에 발 빠르고 활동량 좋은 선수들이 많다 보니 앞선에서부터 타이트하게 상대를 막아설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수비에서도 시너지효과가 컸던 듯 싶습니다. 거기에 외국인선수 아셈 마레이가 적극적인 수비와 허슬플레이 등으로 수비에 공헌한 부분도 상당했고요. 아무래도 해당 팀의 성적에 외국인선수가 끼치는 비중이 높은 것이 사실이잖아요. 그런만큼 외국인선수가 어떤 플레이스타일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팀컬러에 미치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어요. LG 시절만 예를 들어봐도 한창 공격 농구로 명성을 떨칠 때 메인 외국인선수는 에릭 이버츠였거든요. 안정적인 공격력이 최대 장점이었죠. 반면 마레이는 수비에서 공헌도가 높았고 발 빠른 선수들과 함께하는 수비 움직임에서 서로간 호흡이 잘 맞았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Q.결과적으로 기대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쉬움이 있었을까요?
수비는 생각보다 잘됐어요. 문제는 공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공수 밸런스는 어느 한쪽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잖아요. 활동량을 왕성하게 가져가는 선수가 많아서 수비도 잘되고 빠른 공수전환도 나쁘지 않았다고 봐요. 문제는 그러한 과정에서 슛이 적재적소에서 어느 정도 터져줘야만 기동력이 제대로 장점이 되거든요. 뭐랄까, 조금 언발란스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더불어 자유투 부분에서의 아쉬움도 큽니다. 사실 자유투는 어지간한 아투보다도 더욱 집중해서 넣어줘야 하는 부분이거든요. 수비 방해 없이 슛을 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잖아요. 쉽게 득점할 수 있는 부분에서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만이 순조롭게 흐름을 이어갈 수 있죠. 반면 그러한 순간에 실패가 잦아지면 선수도 당황스럽고 나중에는 경기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듯 싶어요.
Q.지도하면서 화를 많이 내시는 편인가요?
아뇨. 다같은 성인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요. 프로라는 신분이 있는데 각자 알아서 해야죠. 어차피 몸 관리 잘하고 기량 끌어올려서 잘하면 본인 연봉 올라가는 것이니까요. 저는 강제성을 띄기보다는 선수들을 믿고 아쉬운 부분에 어드바이스만 해주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런 점에서는 (이)상민이도 비슷하겠네요. 사실 이게 맞는 방법이고요. 하지만 가끔은 아직은 현재 선수들이 자율을 마음껏 조절하면서 생활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릴 때부터 수동적인 시스템에 길들여진 선수가 많은 만큼 알아서 하는 쪽에 더 어려움을 느끼는 선수도 있어요. 사실 비슷한 시대에 농구를 한 세대들이라면 다들 공감하는 부분이겠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강압적으로 농구를 가르치는 지도 스타일에 질려버렸거든요. 때리고 욕하고…, 농구 자체보다 이런 쪽이 힘들어서 중간에 손을 놓아버린 선후배들도 많을거에요. 그래서 저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그렇게 하고 싶지않았어요. 더불어 제가 화를 막 내는 성격도 아니에요. 어지간히 화가 나도 그냥 웃어요. 정말 화가 났다 싶으면 ‘임마!’하고 소리치는 정도입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고 무엇보다 맞지 않고 농구를 한 세대가 지도자가 되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지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드리블을 세 번 이상 안치려고 했습니다”
Q.중학교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배재중학교 3학년 무렵에 농구공을 제대로 만져봤어요.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면 아주 많이 늦게 시작했죠. 그때까지 저는 운동을 좋아하던 평범한 학생이었을 뿐입니다. 당시에는 학생수가 정말 많았어요. 저희반만 해도 60명 정도 됐죠. 지금처럼 놀거리가 많은 시기도 아니라서 그때는 공부 안할 때는 대부분 운동장을 뛰어다니면서 노는게 전부였습니다. 저도 달리기, 축구, 농구 등을 좋아했고 반대항 대회에도 자주 나가고 그랬어요. 어느날 축구랑 농구랑 저희반이 결승에 올라갔는데 선생님께서 찾아오시더니 축구든 농구든 운동 한번 제대로 해보라고 권하시더라고요.
Q.축구와 농구중 농구를 선택하셨군요. 강백호처럼 바스켓맨이라 그랬던 것일까요?
하하핫…, 그럴리가요. 축구와 농구 둘 다 좋았지만 농구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당시 운동장은 그냥 흙바닥이었어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흙먼지가 날렸죠. 운동을 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았어요. 반면 농구는 실내스포츠에요. 체육관 안에서 운동하는게 너무 좋았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코치 선생님께서 저희 집으로 찾아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설득하셔서 농구의 길로 가게 된거죠. 어쨌든 농구를 너무 늦게 시작해서 기본기 같은게 있을 리가 없었잖아요. 사이즈적인 우위도 없고요. 또래들에 비해 실력이 한참 떨어지는지라 홍대부고 진학 역시 이른바 묻어가는 방식으로 갔어요. 그렇게 가서도 경쟁력이 엄청 떨어지니까 ‘그만두라’는 소리도 자주 들었습니다.
Q.늦은 만큼 기본기도 부족했을 것 같고 신장조차 작았잖아요. 냉정하게 말해 경쟁력이 많이 떨어졌을 것 같아요.
그렇죠. 초등학교때부터 시작한 친구들도 많은 상태에서 기본기가 너무 부족하니까 그 차이를 좁히려면 더 많은 연습 밖에 방법이 없었죠. 하루에 훈련을 다섯 번 했어요. 팀훈련은 팀 훈련대로 하고 개인적으로 계속 훈련에 몰두했던 시절입니다. 오전, 오후, 야간 거기에 새벽에까지…, 실력 향상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농구부에서 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거에요. 그렇게 2년여를 꾸준히 하니까 저에게도 게임을 뛰게 될 기회가 오더라고요.
Q.그래서 더 슈팅에 집중하게 된 것일까요? 이것저것 고르게 다 잘하기에는 어려웠을테니까요.
일단 키가 작으니까 안에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외곽 플레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이야 신장이 작은 선수를 대상으로도 다양한 스킬트레이닝이 이뤄지잖아요. 그때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골밑에서 몸싸움하면서 포스트 플레이하던지 아니면 외곽에서 슛을 쏘는 것이었죠. 그런 점에서는 고교시절 후배이기도 한 (이)상민이가 대단했어요.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했는데도 넓은 시야, 다양한 패싱플레이 등 최고의 1번으로 활약했잖아요. 의도적으로 키워진 것도 아닌 상민이가 그냥 타고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었죠. 어쨌거나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슛외에 할 수 있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Q.사실 특정 부분을 무기로 들고나오는 선수 중에는 슈터 유형이 가장 많지 않나요? 그만큼 경쟁률도 셀 것 같고요.
슛좋은 선수들은 워낙 많죠. 저만의 경쟁력이 없으면 저도 그 많은 선수들 속 한명으로 사라져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간결하게 플레이하려고 노력했어요. 드리블을 세 번 이상 안치려고 했어요. 무조건 그 안에 해결하려고 했죠. 어설프게 볼 오래 가지고 있어봤자 저만 손해니까요. 아, 팀에게도 손해겠네요.(웃음)
Q.신장 때문에 스트레스도 좀 받았을 듯 싶어요.
별로요. 컷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당장 할 수 있는 선에서 경쟁력을 찾아가려고했죠. 바뀔수없는 것을 가지고 스트레스 받으면 나만 손해에요. 잘 안되는 것에 계속 미련을 가지고 집착해도 손해고요. 나는 신장이 이것밖에 안되고 할수있는게 이정도니까 이 안에서 승부를 봐야겠다 딱 그마음이었죠.
“납조끼입고 줄넘기 했습니다”
Q.학창시절 롤모델이 궁금합니다.
이충희 선배님이죠. 그분을 보면서 꿈도 꿀 수 있었고 많은 동기부여도 됐죠. 아마 저뿐 아니라 모든 후배 슈터들의 롤모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슛도사’였겠어요.
Q.연세대, 고려대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명지대를 선택하셨어요.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고등학교를 갈 때 제가 업혀서 갔잖아요. 한번 그렇게 신세를 졌는데 조금 컸다고 혼자 냉큼 가버릴 수는 없잖아요. 당시 저희 동기가 9명이었는데 현실적으로 진학이 쉽지 않은 친구도 있었거든요. 연세대, 고려대에서는 저 혼자만 오라고 했는데 명지대에서는 다 받아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가게 된 것입니다.
Q.상무에 입대한 후 뒤늦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일부에서는 ‘저렇게 잘하는 선수가 왜 안 알려졌지?’하고 의아한 분위기까지 있었으니까요.
늦게 알려졌다기보다는 그렇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농구인기가 엄청 좋았잖아요. 각 대학, 실업에서 스타 선수들이 무수히 쏟아져나왔고요. 조금만 농구 잘해도 눈에 띄는 시기였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저는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만큼 눈에 띄게 농구를 하지 못했던 이유가 컸겠죠. 어찌어찌 상무까지 가게 됐는데 거기서도 제대로 못하면 농구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간절함이 가슴에 가득했습니다. 다행히 멤버도 좋았어요. (문)경은이, 상민이, (김)재훈이, (봉)하민이, (김)도명이, (조)동기 등 쟁쟁한 선수들이 함께 했고 팀 밸런스도 나쁘지 않았죠. 문제는 거기서 못해버리면 영영 묻힐 수 있으니까 주전에 끼기 위해 무진장 발버둥쳤습니다.
Q.대학 후배 (조)성훈 감독한테 ‘성원이 형은 돌멩이를 가지고 슛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어요.
아…, 힘과 비거리를 늘리기 위한 훈련이었습니다. 10kg 정도 되는 돌을 항상 머리맡에 놔두고 자요. 그리고는 새벽 1시고, 2시고 중간에 꼭 일어나서 슈팅 연습을 몇 백개씩 하는 것이죠. 돌을 손으로 집은 다음 어깨에 걸치고 슛을 쏘듯 팔을 하늘로 쭉 뻗는 거에요.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슛 자세를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듯 싶지만 계속하다보면 그렇지않아요. 슛 자세도 탄탄해지고 거리도 엄청 늘어나게 됐죠. 기본적으로 힘이 있어야 슛도 쏠 수 있으니까요.
Q.상무 시절에도 본인만의 특별한 개인 훈련은 계속된거죠?
그렇죠. 어차피 기본적인 것은 팀 훈련 속에서 함께 하는 것이니까 저는 저대로 끊임없이 맞춤형 개인 훈련을 구상했습니다. 일단 다양한 슈팅 훈련은 무조건 이어나가야 되는 것이고요. 더불어 제 신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빠르고 높이 뛰어야겠더라고요. 키 작은 선수의 최대 무기는 그런 것이잖아요. 그래서 동대문가서 납조끼 사서 입고 다니고 줄넘기도 엄청 했어요. 특히 줄넘기같은 경우는 당장은 효과를 못볼지 몰라도 오랜시간 하게 되면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빠른 줄넘기, 이단 뛰기, 삼단뛰기 등…, 레퍼토리도 많았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점프력도 엄청 좋아졌던 기억이 나요.
Q.작은 신장을 극복하려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로 슛을 쐈어요.
저도 키가 컸으면 여러 가지 변칙적인 방식이나 타이밍 등에 집착 안하고 정석적으로 안정감있는 자세로 쐈을거에요. 하지만 제가 그렇게 던졌다가는 블록슛 등에 엄청 많이 찍혔을겁니다. 사이즈적인 한계가 뚜렷하다 보니까 극복하려면 갖은 방법을 다 동원될 수밖에 없죠. 중학교 3학년때 고등학교 1학년 형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당시 형이 그런 방식으로 슛을 많이 쐈어요. 어찌보면 그 형한테 영향을 많이 받은 듯 싶어요. 빨리 쏘던지 한템포 늦추면서 타이밍을 죽이던지.
Q.현대 시절 속공을 3점슛으로 마무리하는 장면은 상대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어요.
거기에 대해서 반대 여론이 상당히 많았어요. 그동안 쉽게 보지 못한 장면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어요. 들어가기만 하면 할 말 없는 거잖아요. 또 그렇게 외곽슛을 얻어맞으면 상대팀에서 받는 데미지도 더 클 수밖에 없거든요. 일단 그렇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마인드컨트롤도 많이 했어요. 생각 자체도 ‘이게 뭐, 넣으면 되잖아’식으로 뻔뻔하게 가지려고 노력했고요. 그러다보니 그런 상황이 오면 더 집중할 수 있게 됐고 점차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Q.조성원하면 빠른 발도 빼놓을 수 없죠. 본래부터 스피드는 타고난 것인가요?
초등학교 때 육상도 했고, 발은 원래 빨랐던 것 같아요. 뛰는게 너무 좋았고 그래서 일찌감치 부모님에게 ‘육상으로 체육중학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반대를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배제중학교로 가게된거죠. 어찌됐던 운동 자체가 좋아서 거기 가서도 맨날 뛰어다녔죠. 야구, 축구, 스키, 테니스 등 종목을 가리지 않았어요. 가끔 ‘내가 농구를 안하고 축구나 야구를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일단 스피드에서 남들에게 크게 안 꿀리고 반사신경 그런 것도 좋은 편이니까요. 결정적으로 농구에서나 제가 작지 축구, 야구를 하게 되면 신장이 약점도 아니게 되거든요.
Q.작은 신장 때문에 수비에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신장만 보면 다른 팀 1번과 비슷했잖아요.
아마 지금 시대 같았으면 농구 못했을 것 같아요.(웃음) 당시에도 어려운 편이었죠. 대놓고 저한테 포스트업치고 일대일 걸어오는 선수들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상민이가 고생을 많이 했죠. 바꿔 막기를 통해서 부담도 많이 덜어줬지만 대신 상민이는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그런 면에서는 동료복도 적지 않았던 것 같아요.
Q.말씀하신데로 현대 시절 이상민의 패스와 추승균의 수비 도움은 슈터 조성원에게 큰 도움이 됐잖아요. LG에서는 그런 도움을 받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개인 성적은 더 좋았습니다.
당시 LG팀 컬러와도 잘 맞았죠. 수비보다는 공격을 중시했고 워낙 공수전환을 빠르게 가져갔던 팀 성향상 제 약점이 많이 가려진 부분도 컸습니다. 저 역시 수비에 크게 힘 안 빼고 기회가 오면 냅다 던졌고요. 김태환 감독님이 저를 데려올 때부터 그런 구상을 하셨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그때가 최고 전성기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이 말해주잖아요. 림이 마치 축구 골대처럼 보였으니까요. 어떤 분들은 ‘만약 제가 신장이 이현중처럼 컸다면 NBA갔을 것 같다’는 농담 섞인 말씀도 하시는데요. 스스로 생각할 때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렇게 컸다면 한창 때의 움직임과 탄력이 나오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제 플레이의 상당수는 작은 키를 극복하려고 만들어진 부분도 많거든요.
Q.함께 뛰어본 외국인선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명만 말씀해주세요.
LG에서 전성기를 함께 누렸던 에릭 이버츠가 많이 떠올라요. 특별히 서로 맞춰주려고 했다기보다는 자연스레 쌍포로서 시너지가 발휘됐던 것 같아요. 이버츠도 워낙 슛이 안정적이고 빼어났던지라 함께 코트에 나서면 어느 한쪽으로 더블팀을 가기가 어려웠을거에요. 이대이 게임도 많이 했어요. 워낙 영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게임의 흐름을 잘 읽고 플레이했던 선수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조니 맥도웰같은 경우는 저보다는 상민이랑 호흡이 잘 맞았죠. 저는 둘 사이에서 나오는 볼을 가지고 외곽에서 슛을 쐈고요.
Q.여자프로농구, 여자대학농구, 남자대학농구, 남자프로농구를 모두 경험했어요. 각각의 차이점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런 것 일체 없어요. 어떤 분들은 여자농구는 좀 더 섬세해서 설명방식도 다르고 감정적인 부분도 좀더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시던데 저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봐요. 가르치고 지도하는 입장에서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지 않거든요. 물론 지도자로서 팀을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팀과의 궁합, 선수와의 호흡 등은 중요하다고 봐요. 하지만 그것은 팀과의 문제지 여자농구다 대학농구다로 판단되어질 사항은 아닌 것 같아요.
Q.문경은과 함께 프로농구 역대 최고의 슈터로 불리고 있습니다. 현재 뛰고 있는 선수 중 눈길이 가는 슈터 후배가 있나요?
현재 폼이나 완성도 등을 감안한다면 단연 전성현이죠. 정확성은 물론 이거니와 슛을 던지기까지의 동작이 무척 간결하고 빨라요. 저같은 경우 점프를 많이 뛰면서 쏘는 편이었거든요. 이 친구는 공을 잡았다 싶은 순간에 바로 던지는게 가능해요. 뭐랄까, 최근 농구에 최적화된 슈터같기도 하고요. 오랜만에 정통 슈터의 냄새가 나는 선수잖아요. 손목 스냅 자체가 일정해서 다양한 상황에서도 기복을 덜 타고 슛을 쏘는게 가능한 듯 싶어요. 현역 시절 저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조성원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선수 시절에도 그렇고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팬들의 응원 덕분에 힘이 났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어요. 가장 사랑하는 농구판에서 오래오래 팬들과 뵈며 소통하고 싶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앨런 아이버슨은 다양한 개성파 선수들이 즐비한 NBA 역사에서도 특별한 선수로 꼽힌다. 신장은 183cm에 불과했지만 질풍같은 스피드와 다양한 테크닉을 통해 리그 최상급 스코어러로 명성을 떨쳤으며 최단신 득점왕, 최단신 MVP라는 확실한 결과물까지 만들어냈다. 아이버슨의 대활약은 전 세계 수많은 단신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그가 남긴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면 ‘KBL판 앨런 아이버슨은’에 가장 가까운 선수는 누구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조성원(51‧180cm) 전 창원 LG감독을 꼽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슈팅가드, 스몰포워드 포지션에서 뛰었던 선수치고 매우 작은 사이즈를 가졌지만 폭발적인 공격력만큼은 토종선수 중 역대 최상위권을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농구인들 사이에서는 조성원에 대해 과소평가됐다는 얘기도 많이 나온다.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짧지만 굵은 기록을 KBL 역사에 남겼다. 9시즌을 뛰며 정규리그 432경기에서 총 6,402득점(3점슛 1,002개), 656리바운드, 912어시스트, 514스틸, 56블록슛을 기록했다. KCC에서는 왕조의 한축으로 활약하며 3번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LG시절에는 팀내 주포를 맡아 정규리그 MVP까지 거머쥐었다. 무엇보다 승부처, 큰 경기 등에 강해 승부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손끝에서 갈리는 승부가 워낙 많았던지라 응원팀 팬들에게는 히어로, 상대팀 팬들 입장에서는 악마같은 선수였다.
본인도 밝혔다시피 조성원은 약점이 많았다. 180cm의 신장은 스윙맨으로 뛰기에 경쟁력이 한참 떨어졌다. 사이즈만 봤을 때는 1번 포지션이 어울려 보였으나 늦게 농구를 시작한 탓에 볼컨트롤, 패싱테크닉 등도 부족해 그럴 수도 없었다. “방법은 슛밖에 없었습니다. 이것 아니면 죽는다고 생각했죠”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살아남기 위해 슛을 갈고 닦았고 리그내 쟁쟁한 장신슈터들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엄청난 슛쟁이로 위용을 떨쳤다.
현역 시절에도 그랬지만 슈터 조성원은 겸손함이 몸에 배여있다. 이충희, 문경은 등과 함께 누구나 인정하는 역대급 슈터임에도 ‘저보다 슛 잘던지는 선수는 넘쳐났습니다’라는 말로 늘 자신을 낮춘다. 어쩌면 그러한 성격을 가졌던 탓에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을 거듭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공격 농구가 하고 싶었는데 수비에서 더 결과물이 좋더라고요”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에는 그냥 쉬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특별한 계획같은 것은 없고요. 잠깐 휴식의 시간을 가지면서 이것저것 천천히 생각해봐야죠. 빡빡했던 일정 때문에 지인들도 잘 못 만나고 그랬는데 요즘은 여유있게 만남도 가지면서 간만에 슬로우템포를 즐기고 있습니다. 농구는 빠른게 무조건 좋은데 일상은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은 것 같네요. 그래도 마냥 여유를 즐길 수는 없고 뭔가는 해야겠죠. 처자식도 있으니까 먹여는 살려야되잖아요.(웃음)
Q.현장을 떠나신지 얼마되지 않아서 몸이 근질근질하실 것 같아요.
하하핫…,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덜 근질근질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요 몸의 반응이 느려요. 현역시절 같았으면 며칠만 쉬워도 몸이 근질근질했을 텐데 나이 먹으니까 천천히 오네요. 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급하지 않게 보되 확실히 들어오는 것은 제대로 보려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재충전 기간이라고 할 수 있죠.
Q.김태환 감독의 LG시절 공격농구의 선봉에 셨잖아요. 공격 성향이 강한 이관희, 이재도를 통해 그러한 농구를 재현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꼭 노리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농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선수로서도 팀적으로도 화끈하게 잘나갔던 시절이잖아요. 그런데 다들 김태환 감독님의 LG시절 농구를 ‘외곽슛 농구’라고 생각하시는 경향이 많더라고요. 3점슛 비중을 확 높여서 상대를 압박하는 한편 저와 에릭 이버츠 거기에 (조)우현이, (이)정래 등 슈터 자원이 워낙 많아서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기실 핵심은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득점 쟁탈전에서 앞서 나가는 화력 농구는 맞지만 주는 외곽슛이 아닌 스피드였죠. 상대가 전열을 갖추기 전에 빠르게 공격하고 다시 수비로 전환하는…, 김태환 감독님이 추구하는 농구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3점슛도 톡톡한 옵션으로 작용했고요. 제가 외곽슛이 좋다고는 하지만 발이 느렸다면 중용 받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만큼 당시 감독님의 기조는 ‘빠르게, 더욱 빠르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그런 농구를 좋아하기도 하고 지도자로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사실 이재도 영입은 당시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수를 데려온 의미가 커요. 발이 빠르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꼭 데려오고 싶어서 구단에 요청을 했는데 들어주셔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하지만 의외로 공격보다는 수비에서 더 결과가 좋았어요.
본래는 공격 농구를 추구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수비에서도 강점을 발휘하게 되더라고요. 좋은거잖아요.(웃음) 팀 내에 발 빠르고 활동량 좋은 선수들이 많다 보니 앞선에서부터 타이트하게 상대를 막아설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수비에서도 시너지효과가 컸던 듯 싶습니다. 거기에 외국인선수 아셈 마레이가 적극적인 수비와 허슬플레이 등으로 수비에 공헌한 부분도 상당했고요. 아무래도 해당 팀의 성적에 외국인선수가 끼치는 비중이 높은 것이 사실이잖아요. 그런만큼 외국인선수가 어떤 플레이스타일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팀컬러에 미치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어요. LG 시절만 예를 들어봐도 한창 공격 농구로 명성을 떨칠 때 메인 외국인선수는 에릭 이버츠였거든요. 안정적인 공격력이 최대 장점이었죠. 반면 마레이는 수비에서 공헌도가 높았고 발 빠른 선수들과 함께하는 수비 움직임에서 서로간 호흡이 잘 맞았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Q.결과적으로 기대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쉬움이 있었을까요?
수비는 생각보다 잘됐어요. 문제는 공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공수 밸런스는 어느 한쪽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잖아요. 활동량을 왕성하게 가져가는 선수가 많아서 수비도 잘되고 빠른 공수전환도 나쁘지 않았다고 봐요. 문제는 그러한 과정에서 슛이 적재적소에서 어느 정도 터져줘야만 기동력이 제대로 장점이 되거든요. 뭐랄까, 조금 언발란스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더불어 자유투 부분에서의 아쉬움도 큽니다. 사실 자유투는 어지간한 아투보다도 더욱 집중해서 넣어줘야 하는 부분이거든요. 수비 방해 없이 슛을 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잖아요. 쉽게 득점할 수 있는 부분에서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만이 순조롭게 흐름을 이어갈 수 있죠. 반면 그러한 순간에 실패가 잦아지면 선수도 당황스럽고 나중에는 경기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듯 싶어요.
Q.지도하면서 화를 많이 내시는 편인가요?
아뇨. 다같은 성인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요. 프로라는 신분이 있는데 각자 알아서 해야죠. 어차피 몸 관리 잘하고 기량 끌어올려서 잘하면 본인 연봉 올라가는 것이니까요. 저는 강제성을 띄기보다는 선수들을 믿고 아쉬운 부분에 어드바이스만 해주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런 점에서는 (이)상민이도 비슷하겠네요. 사실 이게 맞는 방법이고요. 하지만 가끔은 아직은 현재 선수들이 자율을 마음껏 조절하면서 생활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릴 때부터 수동적인 시스템에 길들여진 선수가 많은 만큼 알아서 하는 쪽에 더 어려움을 느끼는 선수도 있어요. 사실 비슷한 시대에 농구를 한 세대들이라면 다들 공감하는 부분이겠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강압적으로 농구를 가르치는 지도 스타일에 질려버렸거든요. 때리고 욕하고…, 농구 자체보다 이런 쪽이 힘들어서 중간에 손을 놓아버린 선후배들도 많을거에요. 그래서 저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그렇게 하고 싶지않았어요. 더불어 제가 화를 막 내는 성격도 아니에요. 어지간히 화가 나도 그냥 웃어요. 정말 화가 났다 싶으면 ‘임마!’하고 소리치는 정도입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고 무엇보다 맞지 않고 농구를 한 세대가 지도자가 되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지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드리블을 세 번 이상 안치려고 했습니다”
Q.중학교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배재중학교 3학년 무렵에 농구공을 제대로 만져봤어요.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면 아주 많이 늦게 시작했죠. 그때까지 저는 운동을 좋아하던 평범한 학생이었을 뿐입니다. 당시에는 학생수가 정말 많았어요. 저희반만 해도 60명 정도 됐죠. 지금처럼 놀거리가 많은 시기도 아니라서 그때는 공부 안할 때는 대부분 운동장을 뛰어다니면서 노는게 전부였습니다. 저도 달리기, 축구, 농구 등을 좋아했고 반대항 대회에도 자주 나가고 그랬어요. 어느날 축구랑 농구랑 저희반이 결승에 올라갔는데 선생님께서 찾아오시더니 축구든 농구든 운동 한번 제대로 해보라고 권하시더라고요.
Q.축구와 농구중 농구를 선택하셨군요. 강백호처럼 바스켓맨이라 그랬던 것일까요?
하하핫…, 그럴리가요. 축구와 농구 둘 다 좋았지만 농구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당시 운동장은 그냥 흙바닥이었어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흙먼지가 날렸죠. 운동을 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았어요. 반면 농구는 실내스포츠에요. 체육관 안에서 운동하는게 너무 좋았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코치 선생님께서 저희 집으로 찾아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설득하셔서 농구의 길로 가게 된거죠. 어쨌든 농구를 너무 늦게 시작해서 기본기 같은게 있을 리가 없었잖아요. 사이즈적인 우위도 없고요. 또래들에 비해 실력이 한참 떨어지는지라 홍대부고 진학 역시 이른바 묻어가는 방식으로 갔어요. 그렇게 가서도 경쟁력이 엄청 떨어지니까 ‘그만두라’는 소리도 자주 들었습니다.
Q.늦은 만큼 기본기도 부족했을 것 같고 신장조차 작았잖아요. 냉정하게 말해 경쟁력이 많이 떨어졌을 것 같아요.
그렇죠. 초등학교때부터 시작한 친구들도 많은 상태에서 기본기가 너무 부족하니까 그 차이를 좁히려면 더 많은 연습 밖에 방법이 없었죠. 하루에 훈련을 다섯 번 했어요. 팀훈련은 팀 훈련대로 하고 개인적으로 계속 훈련에 몰두했던 시절입니다. 오전, 오후, 야간 거기에 새벽에까지…, 실력 향상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농구부에서 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거에요. 그렇게 2년여를 꾸준히 하니까 저에게도 게임을 뛰게 될 기회가 오더라고요.
Q.그래서 더 슈팅에 집중하게 된 것일까요? 이것저것 고르게 다 잘하기에는 어려웠을테니까요.
일단 키가 작으니까 안에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외곽 플레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이야 신장이 작은 선수를 대상으로도 다양한 스킬트레이닝이 이뤄지잖아요. 그때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골밑에서 몸싸움하면서 포스트 플레이하던지 아니면 외곽에서 슛을 쏘는 것이었죠. 그런 점에서는 고교시절 후배이기도 한 (이)상민이가 대단했어요.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했는데도 넓은 시야, 다양한 패싱플레이 등 최고의 1번으로 활약했잖아요. 의도적으로 키워진 것도 아닌 상민이가 그냥 타고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었죠. 어쨌거나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슛외에 할 수 있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Q.사실 특정 부분을 무기로 들고나오는 선수 중에는 슈터 유형이 가장 많지 않나요? 그만큼 경쟁률도 셀 것 같고요.
슛좋은 선수들은 워낙 많죠. 저만의 경쟁력이 없으면 저도 그 많은 선수들 속 한명으로 사라져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간결하게 플레이하려고 노력했어요. 드리블을 세 번 이상 안치려고 했어요. 무조건 그 안에 해결하려고 했죠. 어설프게 볼 오래 가지고 있어봤자 저만 손해니까요. 아, 팀에게도 손해겠네요.(웃음)
Q.신장 때문에 스트레스도 좀 받았을 듯 싶어요.
별로요. 컷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당장 할 수 있는 선에서 경쟁력을 찾아가려고했죠. 바뀔수없는 것을 가지고 스트레스 받으면 나만 손해에요. 잘 안되는 것에 계속 미련을 가지고 집착해도 손해고요. 나는 신장이 이것밖에 안되고 할수있는게 이정도니까 이 안에서 승부를 봐야겠다 딱 그마음이었죠.
“납조끼입고 줄넘기 했습니다”
Q.학창시절 롤모델이 궁금합니다.
이충희 선배님이죠. 그분을 보면서 꿈도 꿀 수 있었고 많은 동기부여도 됐죠. 아마 저뿐 아니라 모든 후배 슈터들의 롤모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슛도사’였겠어요.
Q.연세대, 고려대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명지대를 선택하셨어요.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고등학교를 갈 때 제가 업혀서 갔잖아요. 한번 그렇게 신세를 졌는데 조금 컸다고 혼자 냉큼 가버릴 수는 없잖아요. 당시 저희 동기가 9명이었는데 현실적으로 진학이 쉽지 않은 친구도 있었거든요. 연세대, 고려대에서는 저 혼자만 오라고 했는데 명지대에서는 다 받아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가게 된 것입니다.
Q.상무에 입대한 후 뒤늦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일부에서는 ‘저렇게 잘하는 선수가 왜 안 알려졌지?’하고 의아한 분위기까지 있었으니까요.
늦게 알려졌다기보다는 그렇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농구인기가 엄청 좋았잖아요. 각 대학, 실업에서 스타 선수들이 무수히 쏟아져나왔고요. 조금만 농구 잘해도 눈에 띄는 시기였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저는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만큼 눈에 띄게 농구를 하지 못했던 이유가 컸겠죠. 어찌어찌 상무까지 가게 됐는데 거기서도 제대로 못하면 농구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간절함이 가슴에 가득했습니다. 다행히 멤버도 좋았어요. (문)경은이, 상민이, (김)재훈이, (봉)하민이, (김)도명이, (조)동기 등 쟁쟁한 선수들이 함께 했고 팀 밸런스도 나쁘지 않았죠. 문제는 거기서 못해버리면 영영 묻힐 수 있으니까 주전에 끼기 위해 무진장 발버둥쳤습니다.
Q.대학 후배 (조)성훈 감독한테 ‘성원이 형은 돌멩이를 가지고 슛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어요.
아…, 힘과 비거리를 늘리기 위한 훈련이었습니다. 10kg 정도 되는 돌을 항상 머리맡에 놔두고 자요. 그리고는 새벽 1시고, 2시고 중간에 꼭 일어나서 슈팅 연습을 몇 백개씩 하는 것이죠. 돌을 손으로 집은 다음 어깨에 걸치고 슛을 쏘듯 팔을 하늘로 쭉 뻗는 거에요.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슛 자세를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듯 싶지만 계속하다보면 그렇지않아요. 슛 자세도 탄탄해지고 거리도 엄청 늘어나게 됐죠. 기본적으로 힘이 있어야 슛도 쏠 수 있으니까요.
Q.상무 시절에도 본인만의 특별한 개인 훈련은 계속된거죠?
그렇죠. 어차피 기본적인 것은 팀 훈련 속에서 함께 하는 것이니까 저는 저대로 끊임없이 맞춤형 개인 훈련을 구상했습니다. 일단 다양한 슈팅 훈련은 무조건 이어나가야 되는 것이고요. 더불어 제 신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빠르고 높이 뛰어야겠더라고요. 키 작은 선수의 최대 무기는 그런 것이잖아요. 그래서 동대문가서 납조끼 사서 입고 다니고 줄넘기도 엄청 했어요. 특히 줄넘기같은 경우는 당장은 효과를 못볼지 몰라도 오랜시간 하게 되면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빠른 줄넘기, 이단 뛰기, 삼단뛰기 등…, 레퍼토리도 많았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점프력도 엄청 좋아졌던 기억이 나요.
Q.작은 신장을 극복하려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로 슛을 쐈어요.
저도 키가 컸으면 여러 가지 변칙적인 방식이나 타이밍 등에 집착 안하고 정석적으로 안정감있는 자세로 쐈을거에요. 하지만 제가 그렇게 던졌다가는 블록슛 등에 엄청 많이 찍혔을겁니다. 사이즈적인 한계가 뚜렷하다 보니까 극복하려면 갖은 방법을 다 동원될 수밖에 없죠. 중학교 3학년때 고등학교 1학년 형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당시 형이 그런 방식으로 슛을 많이 쐈어요. 어찌보면 그 형한테 영향을 많이 받은 듯 싶어요. 빨리 쏘던지 한템포 늦추면서 타이밍을 죽이던지.
Q.현대 시절 속공을 3점슛으로 마무리하는 장면은 상대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어요.
거기에 대해서 반대 여론이 상당히 많았어요. 그동안 쉽게 보지 못한 장면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어요. 들어가기만 하면 할 말 없는 거잖아요. 또 그렇게 외곽슛을 얻어맞으면 상대팀에서 받는 데미지도 더 클 수밖에 없거든요. 일단 그렇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마인드컨트롤도 많이 했어요. 생각 자체도 ‘이게 뭐, 넣으면 되잖아’식으로 뻔뻔하게 가지려고 노력했고요. 그러다보니 그런 상황이 오면 더 집중할 수 있게 됐고 점차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Q.조성원하면 빠른 발도 빼놓을 수 없죠. 본래부터 스피드는 타고난 것인가요?
초등학교 때 육상도 했고, 발은 원래 빨랐던 것 같아요. 뛰는게 너무 좋았고 그래서 일찌감치 부모님에게 ‘육상으로 체육중학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반대를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배제중학교로 가게된거죠. 어찌됐던 운동 자체가 좋아서 거기 가서도 맨날 뛰어다녔죠. 야구, 축구, 스키, 테니스 등 종목을 가리지 않았어요. 가끔 ‘내가 농구를 안하고 축구나 야구를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일단 스피드에서 남들에게 크게 안 꿀리고 반사신경 그런 것도 좋은 편이니까요. 결정적으로 농구에서나 제가 작지 축구, 야구를 하게 되면 신장이 약점도 아니게 되거든요.
Q.작은 신장 때문에 수비에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신장만 보면 다른 팀 1번과 비슷했잖아요.
아마 지금 시대 같았으면 농구 못했을 것 같아요.(웃음) 당시에도 어려운 편이었죠. 대놓고 저한테 포스트업치고 일대일 걸어오는 선수들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상민이가 고생을 많이 했죠. 바꿔 막기를 통해서 부담도 많이 덜어줬지만 대신 상민이는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그런 면에서는 동료복도 적지 않았던 것 같아요.
Q.말씀하신데로 현대 시절 이상민의 패스와 추승균의 수비 도움은 슈터 조성원에게 큰 도움이 됐잖아요. LG에서는 그런 도움을 받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개인 성적은 더 좋았습니다.
당시 LG팀 컬러와도 잘 맞았죠. 수비보다는 공격을 중시했고 워낙 공수전환을 빠르게 가져갔던 팀 성향상 제 약점이 많이 가려진 부분도 컸습니다. 저 역시 수비에 크게 힘 안 빼고 기회가 오면 냅다 던졌고요. 김태환 감독님이 저를 데려올 때부터 그런 구상을 하셨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그때가 최고 전성기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이 말해주잖아요. 림이 마치 축구 골대처럼 보였으니까요. 어떤 분들은 ‘만약 제가 신장이 이현중처럼 컸다면 NBA갔을 것 같다’는 농담 섞인 말씀도 하시는데요. 스스로 생각할 때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렇게 컸다면 한창 때의 움직임과 탄력이 나오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제 플레이의 상당수는 작은 키를 극복하려고 만들어진 부분도 많거든요.
Q.함께 뛰어본 외국인선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명만 말씀해주세요.
LG에서 전성기를 함께 누렸던 에릭 이버츠가 많이 떠올라요. 특별히 서로 맞춰주려고 했다기보다는 자연스레 쌍포로서 시너지가 발휘됐던 것 같아요. 이버츠도 워낙 슛이 안정적이고 빼어났던지라 함께 코트에 나서면 어느 한쪽으로 더블팀을 가기가 어려웠을거에요. 이대이 게임도 많이 했어요. 워낙 영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게임의 흐름을 잘 읽고 플레이했던 선수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조니 맥도웰같은 경우는 저보다는 상민이랑 호흡이 잘 맞았죠. 저는 둘 사이에서 나오는 볼을 가지고 외곽에서 슛을 쐈고요.
Q.여자프로농구, 여자대학농구, 남자대학농구, 남자프로농구를 모두 경험했어요. 각각의 차이점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런 것 일체 없어요. 어떤 분들은 여자농구는 좀 더 섬세해서 설명방식도 다르고 감정적인 부분도 좀더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시던데 저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봐요. 가르치고 지도하는 입장에서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지 않거든요. 물론 지도자로서 팀을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팀과의 궁합, 선수와의 호흡 등은 중요하다고 봐요. 하지만 그것은 팀과의 문제지 여자농구다 대학농구다로 판단되어질 사항은 아닌 것 같아요.
Q.문경은과 함께 프로농구 역대 최고의 슈터로 불리고 있습니다. 현재 뛰고 있는 선수 중 눈길이 가는 슈터 후배가 있나요?
현재 폼이나 완성도 등을 감안한다면 단연 전성현이죠. 정확성은 물론 이거니와 슛을 던지기까지의 동작이 무척 간결하고 빨라요. 저같은 경우 점프를 많이 뛰면서 쏘는 편이었거든요. 이 친구는 공을 잡았다 싶은 순간에 바로 던지는게 가능해요. 뭐랄까, 최근 농구에 최적화된 슈터같기도 하고요. 오랜만에 정통 슈터의 냄새가 나는 선수잖아요. 손목 스냅 자체가 일정해서 다양한 상황에서도 기복을 덜 타고 슛을 쏘는게 가능한 듯 싶어요. 현역 시절 저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조성원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선수 시절에도 그렇고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팬들의 응원 덕분에 힘이 났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어요. 가장 사랑하는 농구판에서 오래오래 팬들과 뵈며 소통하고 싶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