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면]"펠레가 누구였는지 기억하라"...펠레가 불러낸 정치
토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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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3
'펠레가 누구였는지 기억하라.' 제목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그다음 문장은 '그라운드 안에서는 변화를 이끌었던 인물이지만 그라운드 밖에선 그렇지 못했다'로 이어집니다. 미국 언론 '워싱턴포스트'가 내놓은 펠레 사망 기사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펠레는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기억된다. 그리고 웃어선 안 될 사람들을 위해서도 미소를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지나친 애도와 추모는 걷어냈습니다. 지극히 축구적인 시각은 절제했습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펠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냉정하게 돌아본 거죠. 부끄러워할 만한 일화도 꺼내놓습니다.
'브라질 산투스의 골키퍼가 상대 팬들이 “원숭이”라고 조롱한 것에 맞서자 펠레는 괴롭힌 팬들보다 선수를 꾸짖었습니다. 펠레는 당시 TV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적인 학대를 받을 때마다 멈추거나 소리를 질러야 한다면 모든 경기를 중단해야 할 것”이란 말을 했습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펠레'는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펠레의 또 다른 면을 꺼내놓았습니다. 펠레가 슈퍼스타로 부상하는 1964년부터 1985년까지의 시기는 브라질이 군부 철권통치를 겪던 시기와 겹칩니다. 펠레의 행보는 브라질의 정치 사회적 상황 속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었죠. 군부 독재를 거치며 수 백명이 죽거나 실종되는 상황 속에서 펠레는 침묵했습니다. 대신 당시 지도자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1970년 월드컵 당시 대표팀을 이끌던 살다냐 감독이 정권을 비판하다 사령탑 자리를 뺏긴 것과 대조됐죠. 이 다큐멘터리에서 브라질 기자 바스콘첼로스는 “펠레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잘 대해준 정권을 받아들였다”고 비판했습니다.
스페인 언론 '엘 파이스'는 주저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펠레의 상황을, 되도록 펠레 입장에서 소개합니다.
'펠레는 모든 정치적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려 노력했다. 펠레는 “나는 항상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편들기를 원했습니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 'BBC'는 펠레의 태도가 남긴 공과를 동시에 평가합니다.
'펠레는 정치에 대해선 고개를 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은 펠레의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군사정권 시절에 침묵한 것은 나약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 침묵은 또한 그가 정치를 초월할 수 있게 했고, 경기장 안팎에서 보편적으로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게 해줬다.'
펠레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어떻게 축구를 했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살았는가'에 대한 평가와 마주합니다. 그럼에도 축구를 바꾸고, 그 축구로 브라질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펠레의 힘은 여전합니다.
펠레의 장례식은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브라질 사람들의 기다란 줄로 채워집니다. 지금 브라질은 새 대통령 룰라 체제로 출발대에 섰습니다. 전임 급진 우파 포퓰리스트인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남긴 분열과 갈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펠레의 이름이 불립니다. 펠레는 죽어서도 정치 지형 한복판에 남았고, 또 한 번 통합의 상징으로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펠레는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기억된다. 그리고 웃어선 안 될 사람들을 위해서도 미소를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펠레의 장례식, 한 브라질 여성이 펠레 사진이 담긴 엽서에 키스를 하고 있습니다. (사진=AP연합뉴스)
'브라질 산투스의 골키퍼가 상대 팬들이 “원숭이”라고 조롱한 것에 맞서자 펠레는 괴롭힌 팬들보다 선수를 꾸짖었습니다. 펠레는 당시 TV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적인 학대를 받을 때마다 멈추거나 소리를 질러야 한다면 모든 경기를 중단해야 할 것”이란 말을 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세상을 떠난 펠레를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돌아봤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일에 반기를 든 알리와 비교하며 펠레는 옳지 못한 정치 체제에 침묵했다고 썼습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펠레'는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펠레의 또 다른 면을 꺼내놓았습니다. 펠레가 슈퍼스타로 부상하는 1964년부터 1985년까지의 시기는 브라질이 군부 철권통치를 겪던 시기와 겹칩니다. 펠레의 행보는 브라질의 정치 사회적 상황 속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었죠. 군부 독재를 거치며 수 백명이 죽거나 실종되는 상황 속에서 펠레는 침묵했습니다. 대신 당시 지도자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1970년 월드컵 당시 대표팀을 이끌던 살다냐 감독이 정권을 비판하다 사령탑 자리를 뺏긴 것과 대조됐죠. 이 다큐멘터리에서 브라질 기자 바스콘첼로스는 “펠레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잘 대해준 정권을 받아들였다”고 비판했습니다.
굿바이 펠레. 브라질 상파울루에 마련된 장례식엔 많은 브라질 사람들의 조문이 이어졌습니다. (사진=AP연합뉴스)
스페인 언론 '엘 파이스'는 주저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펠레의 상황을, 되도록 펠레 입장에서 소개합니다.
'펠레는 모든 정치적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려 노력했다. 펠레는 “나는 항상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편들기를 원했습니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 'BBC'는 펠레의 태도가 남긴 공과를 동시에 평가합니다.
'펠레는 정치에 대해선 고개를 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은 펠레의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군사정권 시절에 침묵한 것은 나약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 침묵은 또한 그가 정치를 초월할 수 있게 했고, 경기장 안팎에서 보편적으로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게 해줬다.'
브라질은 펠레를 향한 존중과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로 묶어주는 통합의 키워드는 다시 '펠레'입니다. (사진=AP연합뉴스)
펠레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어떻게 축구를 했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살았는가'에 대한 평가와 마주합니다. 그럼에도 축구를 바꾸고, 그 축구로 브라질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펠레의 힘은 여전합니다.
펠레의 장례식은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브라질 사람들의 기다란 줄로 채워집니다. 지금 브라질은 새 대통령 룰라 체제로 출발대에 섰습니다. 전임 급진 우파 포퓰리스트인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남긴 분열과 갈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펠레의 이름이 불립니다. 펠레는 죽어서도 정치 지형 한복판에 남았고, 또 한 번 통합의 상징으로 여전히 살아있습니다.